양민영 — 10번째 옷정리
날씨가 더워지는 요즘, 옷장 정리를 할 시기다. 오늘은 또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 고민이 된다. 분명 작년에는 잘 입던 옷인데, 막상 입고 거울을 보면 어딘가 별로다. 옷장에 옷은 많은데, 입을 옷이 없다.
‘옷정리’는 이름 그대로 안 입는 옷을 정리하는 행사다. 2016년 개인적인 옷장 정리에서 시작해 규모와 운영 방식이 조금씩 바뀌어왔고, 어느덧 올해로 10번째 행사를 열게 됐다. 두 번째 ‘옷정리’에 방문했던 지인이 “나도 팔 옷이 많다”고 말한 것이 계기가 되어 여럿이 함께하는 형태로 이어졌고, 현재까지 약 200명(팀)의 여성 작업자들이 참여해왔다.
‘옷정리’는 옷을 판매하는 행사이기도 하지만, 다양한 분야의 창작자들을 소개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참여자들이 내놓는 ‘옷에 대한 이야기’는 그 사람을 소개하는 자연스러운 방식이 되어왔다.
열번째 ‘옷정리’를 기념하며, 이번에 내놓은 10가지 옷을 통해 ‘옷정리’와 나의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10초 만에 반해서 산 옷
10년 차 ‘옷정리’ 기획자임에도 불구하고 내 옷장에는 여전히 팔 옷이 있다. 사실 옷 정리는 생각보다 에너지가 많이 드는 일이다. 옷더미를 보면 어디서부터 정리해야 할지 막막하고, 몇 개 입어보다 보면 금세 지친다. 그러다 난데없이 추억 여행에 빠지기도 한다. 행사를 준비하다 보면 정신이 없어서 막상 내 옷을 정리할 시간이 없기도 하고(물론 핑계다), 욕심이 많아서 아직 가지고 있는 옷도 적지 않다. 일 년에 한 번 입을까 말까 하면서도 팔기 아까워서 남겨둔 것들이 대부분이다.
물개 삼총사가 프린트된 노란색 빈티지 맨투맨도 그중 하나다. 빈티지 숍을 한참 많이 다니던 시절, 귀여운 동물이 그려진 티셔츠에 자주 반하곤 했는데 이 옷도 거의 10초 만에 반해서 샀다. 귀여운 옷이 나에게 잘 어울려서라기보다는, 그냥 좋아서 입는 것에 가깝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자랑할 기회가 자주 오지는 않는다. 나 대신 이 귀여움을 더 자주 자랑해줄 분이 나타나길 바란다.

10번도 안 입은 상태 좋은 옷
하단에 있는 그라데이션 불꽃 프린트가 멋진 바지. 입으면 발등에 정말 불이 떨어진 것 같은 디자인이다. 어느샌가 불꽃이 들어간 아이템만 보이면 사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디자인 사업자 이름을 ‘불도저’로 짓고부터였던 것 같다. 옷에 자아를 투영하는 편이라, ‘불도저인데 불꽃 정도는 입어줘야지’ 같은 이상한 사고의 회로가 생겼다. 나중에 들으니 사주에 화(火)가 부족하다던데, 그래서 이렇게 불꽃 아이템에 꽂혔나 싶기도 하다. (농담이다)
멋진 바지지만 많이 입지는 못했다. 불도저 대표로 북토크에 나갈 때 한 번 입고, 그 이후로는 잘 손이 가지 않았다. 이유는 나에게 길이가 길다는 점이었다. 바지 밑단의 불꽃 프린트가 포인트인데 기장을 줄이면 불꽃이 사라지니 줄일 수도 없고 말이다. 사주에 화가 부족하고 나보다 다리가 긴 분에게 안성맞춤일 것 같다.

10년 전의 나를 떠올리게 하는 옷
어깨에 술이 달린 검정색 스타스타일링 스웻셔츠. 사실 10년보다 더 오래된 것 같긴 하지만, 여튼 추억의 아이템이다. 당시 멋쟁이들의 성지였던 데일리 프로젝트에서 샀던 것 같다.
20대를 함께 보낸, 나를 포함한 삼총사가 있었다. 그 당시에는 딱히 놀거리가 없어서(?) 공통 관심사였던 옷을 보러 종종 돌아다녔다. 학동 데일리 프로젝트에 가서 해외 디자이너 옷을 보고, 서대문 빈티지파이에 가서 빈티지 옷을 보고, 명동에서 에이랜드와 아메리칸 어패럴을 구경하는 식이었다.
돈이 없어서 옷을 많이 사지는 못했지만, 서로에게 어울릴 것 같은 옷을 추천해주고 가끔은 이상한 옷을 추천해서 열받게 하기도 하는, 나름 재미있는 놀이였다. 그때의 나는 특히 리버시블이나 비대칭 같은 좀 전위적이고 해체적인 느낌의 옷에 꽂혀있었다. 이 옷도 그 시절의 취향이 남아 있는 옷이다. 그래서인지 추억템으로 여태 놓아주지 못했다. 옷을 정리해야 사주가 트인다는 말이 있다. 이제 추억이 담긴 옷들도 놔주려고 한다. 운수대통을 기대하며…

10만 원 이상 주고 산 옷
르메르 코트. 앞섬의 긴 카라로 다양한 룩을 연출할 수 있는, 왠지 커피향이 느껴질 것만 같은 분위기 있는 옷이다. 이 옷은 2023년에 다팜에서 진행했던 ‘옷정리8’에 동료 디자이너가 내놓았던 옷이다. 당시 88명의 옷을 위탁받아 약 한 달 동안 행사를 운영했고, 마지막 주는 세일 기간이었다. 이 코트는 그때까지 팔리지 않고 남아 있었다. 행사 기간 동안 거의 내내 출근을 했는데, 이상하게 그 공간에 있다 보면 안 보이던 예쁜 옷이 계속 발견된다. 이 코트도 계속 눈에 밟히다가 내가 입기보다는 엄마가 입으면 좋을 것 같아 나름 거금을 들여(?) 구매했다.
효도템으로 드린 것이었지만, 기장이 좀 길어서 잘 안 입게 된다고 하셔서 결국 ‘옷정리10’에 다시 내놓게 되었다. 돌고 돌아 다시 ‘옷정리’로 돌아온 옷이다.

10번째 ‘옷정리’에 다시 꺼낸 옷
나이키×꼼데 콜라보 운동화. 형광 핑크색이 아주 멋진 신발이다. 아마 일본에 놀러 갔을 때 샀던 것 같다. 여행을 가면 평소보다 조금 더 기분 내서 사게 되는 물건들이 있는데 이 신발도 그중 하나였다.
‘옷정리’ 용어로 일명 ‘재수템’. 이전 옷정리 행사에도 내놓았지만 팔리지 않아 다시 등장한 아이템이라는 뜻이다. 아끼는 신발이지만 1년에 한 번 정도밖에 신지 않으니 (발볼이 넓은 편이라 사이즈가 좀 작다.) 이제는 보내야겠다 싶어 내놓았는데, 결국 안 팔렸다. 귀한 자식을 보내기로 결심하고 내놓았는데 인기가 없을 때의 안타까움이란.
물론 이 운동화의 잘못은 아니다. 한 아이템을 사고파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취향과 가격, 사이즈가 삼위일체로 맞아야 함은 물론, 그날의 기분, 공기, 온도, 습도, 분위기까지 작용해야 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10번쯤 고민하다 결국 내놓는 옷
COS 주황색 셋업. 섬세한 코디 능력이 없는 관계로 상하의 깔맞춤을 좋아한다. 이 옷도 세트로 입고 싶어서 자켓을 먼저 구하고, 아래 치마를 다른 지점에서 따로 구했다.
위 글에 등장한, 옷으로 우정을 쌓은 절친 두 명에게 생일 선물로 받았던 옷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제 나이가 들어 생일 선물을 옷으로 주고 받는 사이가 되었다.) 선물 받은 물건은 팔기가 좀 그렇다. 아무래도 추억과 성의가 담겨 있으니까. 혹시라도 팔다가 사준 사람이 보면 곤란하니까.
문제는 이렇게 주황을 세트로 입고 갈 데가 잘 없다. 치마를 잘 안 입기도 하고. 사실 요즘은 잘 마르는 운동복만 입는 것 같다. 치마는 이미 먼저 내놓았고, 이제는 위 자켓도 보낸다. 친구들 눈치를 보면서 10번쯤 고민하다가.

10년이 지나도 유행 안 탈 옷
빈티지 표범 셔츠. 레오파드 프린트 자체도 멋지지만 진짜 포인트는 눈이다. 표범 눈알마다 큐빅이 박혀 있어서 움직일 때마다 눈빛이 반짝이는, 실물이 진짜 멋진 옷이다. 뭐 이 정도면 취향은 타도 유행은 안 타지 않을까?
자주 들르는 동선 중 지하철 환승역 안에 빈티지 옷을 싸게 파는 ‘빈프라임’이 있었다. 참새가 방앗간을 못 지나치듯, 그 앞을 그냥 지나가기가 어려웠다. 바쁠 때는 아쉬움을 남기고 지나쳤지만, 약속 시간까지 애매하게 뜨고 체력이 남아 있을 때면 꼭 들어가 보물찾기하듯 옷을 구경했다.
이 셔츠도 그 시절 데려온 아이템이다. 꽤 오래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는 놓아주려고 한다. 운명의 주인을 만나기를.

10번째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옷
직조된 자카드 패브릭이 멋진 자켓. 작년에 더현대 서울에서 열린 빈티지 팝업에서 샀다. 아마 빈티지 패브릭을 리폼해서 만든 옷인 것 같다. 나에게 어울릴지는 크게 생각하지 않고, 아이템 자체가 멋있어서 샀다. (글을 읽을 수록 뭔가에 계속 꽂혀서 사는 미친 사람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어느 정도는 맞고, 이 모든 일은 10년 이상에 걸쳐 일어났다는 점을 기억해주었으면 한다.) 뒤에 적힌 문구도 멋지다. 패브릭으로도 옷의 형태로도 이미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왔을 것 같은, 나를 지나 또 다른 누군가의 옷장에 들어가고, 또 언젠가 10번째 옷장을 만날 것 같은 옷이다.

여기까지 열번째 ‘옷정리’에 내놓은 여러 개의 옷을 소개해보았다. 이 옷들은 이 글이 발행되기 이전에 이미 팔렸을 수도 있다. 팔렸다면 누군가의 옷장으로 들어가 더 자주 입히는 옷이 되었으면 좋겠다. 안 팔렸다면 올해에 더 입어보도록 해야겠다.

옷정리10: 토요플리마켓
일시: 2026년 5월 9, 16, 23, 30일 12:00~19:00
장소: 다팜 (서울시 중구 을지로 108 5층)
양민영 @meanyounglamb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불도저 대표, 옷정리 기획자, 공간 다팜 운영자, 잡지 쿨 발행인. 상하의 깔맞춤 애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