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희준 — 아, 진실이라는 모래알이 내 발밑을 찔러서 따갑다! 고 말해도 될까?

우희준 — 아, 진실이라는 모래알이 내 발밑을 찔러서 따갑다! 고 말해도 될까?

어려운 책을 샀다. 뭔가 알고 싶어서. 대단한 것을 알고 싶어서. 알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서. 

시뮬라시옹-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진실은 더 이상 발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산되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진실, 현실은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붕괴되면서 스스로 생산되는 것이라고 하는데, 솔직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한 번에 이해되지 않게 말하는 것은 나 같은 사람들은 진실을 알 자격이 없다는 뜻으로 들린다. 진실을 알기 위해 쏟아야만 하는 나의 노력은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일까. 당신 같은 사람은 진실에서 나는 빛을 단번에 알아차리고, 그것에 단번에 이끌려 살아왔기에 ‘진실을 발견하는 것은 더 이상 내게 허무맹랑한 일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그 일이 우습다고 말하는 것일까.
아, 진실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기에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가. 다시는 꼴도 보기가 싫다. 

그래, 나는 길게 말하는 사람이 싫다. 

 

몇 년 후… 

내가 오해한 부분이 있었다. 보드리야르는 ‘진실을 아는 자들이 있다’는 생각 자체를 부수려 했던 사람인 것 같다. 그 어떤 누구도 진실의 주인이 아니라는 말이다. 진실을 독점하는 구조가 현대 사회의 폭력이라는 것 같은데, 사실 여기까지는 조금 당연한 말 같다. 현대라던가 사회라던가 하는 말도 익히 듣던 말이다.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 자주 쓰는 말. 그러니까 “너는 모르지만 나는 안다”가 아니라, “사실 아무도 모르는데 어떤 사람들이 ‘자기만 안다’고 거짓 권위를 세우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예를 들어보자. 

모래 같은 것이 불쾌하고 따갑다는 것은 다들 익히 아는 사실일 테지. 이를테면 “발바닥의 모래를 털어내지 않아도 너무 살 만해요!” 이렇게 말하는 건 당연하게도 거짓말처럼 들려오지 않는가. 이건 상징적 진실이다. 모두가 아는 사실… 경험적으로 대부분이 공유하는 사실! 그런데 보드리야르는 이런 ‘공유된 사실’마저도 진실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모래가 따갑다 ↔ 아니다”,
“과학적 사실 ↔ 거짓”

이런 감각적, 물리적, 경험적 진실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그는 물리적 세계의 진실을 부정하지 않고, 사회가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적 진실’을 말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이 일은 너무 복잡해서 모래알을 밟는 것만큼 따갑다. 그래서 다시 책을 덮는다. 

 

2025년 7월 15일

내 불행은 이것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삶은 ‘이런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누군가 나의 자리를 빼앗았기 때문에 내 자리는 이곳이다, 우리에게는 할당된 것이 있다, 그것을 나눠 가지며 살고 있다. 

그리고 언어가 하는 일… 나는 사실 언어를 혐오한다. 나는 음표 안에 갇히고 싶어. 철학자들의 운명은 그렇다. 애초에 언어로 다 알 수도, 담을 수도 없는 복잡한 현실을 담아내려는 사람들. 매번 거절당하는, 한 생에서 완료될 수 없는 일을 시작한 사람들. 

그래, 나는 역시 길게 말하는 사람이 싫다. 

어떤 사람들은 내 발밑에 있고 어떤 사람들은 내 위에 있어. 이게 진실이야. 내 눈앞에 있는, 내 발밑을 찔러서 따가운, 따가울 만큼 생생한 진실은 이거니까. 


2025년 11월 6일

“모래가 따갑다.”

어느 날, 그러니까 갑작스럽게 어느 날, 모래를 밟는 것이 유독 따가웠다. 그러다가 다음 생각이 빠르게 따라붙었어. 모래가 따갑다고 말해도 될까?

이건 나의 촉각과 경험으로… ‘감각적으로 받아들여진 진실’이다. 보드리야르가 문제 삼는 건 그다음이지. ‘진실의 모델’을 만들어서 우리가 실제로, 따갑도록 경험한 진실을 무시하거나 재정의하는 과정. 그렇게 되면 네가 실제로 느끼는 따가움은 사라지고 그 대신 사회가 말하는 모델이 “진실”이 되어버린다. 우리는 거짓을 말하는 사람이 되거나 부정으로 던져지고 내몰려. 혹은 노력하지 않는 사람… 노력. 그놈의 노력! 이게 바로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시뮬라시옹의 폭력일까.

부정, 긍정의 도식은 우리에게 동일하게 주어지지 않아. 우리를 교란시키고 멀어지게 만드는 기표들. 

“모래는 사실 따갑지 않다.”

우리가 느끼는 불쾌함은 ‘진실’이지만 사회는… 사회라고 말하는 것도 사실 문제가 있어. 우리를 기표와 기의가 붕괴된 균열, 틈, 그 어딘가로 내던지는 것은 사회뿐만이 아니야. 그리고 내가 사회라고 말하면 또 어떻게 되겠어? 나는 또 정치라는 기표와 기의의 어딘가로 내던져지겠지… 우리는 그렇게 또 멀어지고… 많은 것들이 내게 자꾸 다르게 말하라고 요구해. 


하이퍼리얼! 더 진실처럼 보이는 진실. 더 진실처럼 보이기 쉬운 것들. 빛나는 것들. 털어내지 않아도 좋을 것들. 우리가 좋아하기 쉬운 것들. 우리가 그 안에서 멀어지고 있어. 우리는 너무 많은 친구들을 떠나보냈어. 나는 너무 많은 친구를 잃었어. 슬프고 외롭다. 

희준아, 너는 왜 이렇게 길게 말하는 사람이 되었니?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아는 척하고 있는 게 아니야, 알지? 우리가 이렇게 웃으며 솔직하게 얘기하지 못하게 하는 하이퍼리얼들을 탓하자. 나는 그것들이 너무 미워. 우리 중에 아무도 진실을 갖고 있지 않잖아. 그러니까 나랑 싸우지 말자. 기표를 생산해야만 말할 수 있는 나여서 미안해. 

“모래는 따갑다.”

그 어떤 사회적 모델보다 먼저 있는 나의 1차적 진실, 내 촉각은 아직 시뮬라시옹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것만이 현실의 잔여(餘)로 남아 있다. 온 삶동안 느꼈던 따가움이 내게 엉겨 붙어있다. 그래도 우리가 이렇게 말로 다 하지 못하는 감각을 주고받다 보면, 하이퍼리얼보다도 생생한 모래알이 우리에게 쌓여서, 우리에게 삶이라는 게 비로소… 비로소 털어내고 싶지 않은 것들로 가득해지지 않을까.

 

우희준 @woohuijun

서울에서 노래하고 (베이스)기타를 치며 돈을 번다. 생각이 참 많으며 활자중독에 시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