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재 — 신도시가 A에게
작년, 신도시 10주년을 앞두고 카바로부터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는 시리즈를 제안받았다. 11주년이 지난 지금까지 두 편의 글을 보냈고, 남은 글에서는 그간의 전시, 외부 프로젝트, 출판과 레이블 작업, 그리고 함께한 아티스트들을 소개하려 했다.
그러나 며칠 전, 신도시 초창기에 함께 활동했던 뮤지션 A에게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공간을 열 계획이라며 만나서 조언을 구했지만 내심 그를 말리고 싶었다. 공간을 운영하기로 마음먹는 데에 신도시의 영향이 컸다는 그에게 마냥 긍정적인 말만 건넬 수는 없었다. 그건 그의 문제가 아니라, 꽃땅부터 15년 가까이 공간을 운영해 왔지만 여전히 내가 극복하지 못한 후회와 콤플렉스가 섞인 고민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화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A, 혹은 다른 사람들, 어쩌면 나 자신에게 남기고 싶은 말들을 정리해 보았다. 대부분 내가 하지 못했거나 했어야 했던 일들에 관한 단상이다.
1. 시작과 정체성
1.1 공간의 정체성은 본인과 소속 커뮤니티의 가치를 기준으로 단순하고 명확하게 정한다. 그 성격에 맞춰 위치, 크기, 조건을 고려하되 월세는 가능한 한 낮은 곳을 택한다.
1.2 가진 돈 안에서, 모두 잃어도 감당할 수 있는 범위로 시작하는 것이 안전하다. 경제적 성공이 목적이라면 공간 운영보다는 주식 투자가 나을 수 있다.
1.3 공간의 정체성은 단순하고 쉬울수록 매력적이지만, 이를 유지하고 지속하는 과정은 복잡하고 까다롭다. 공간을 만드는 것과 운영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영역이므로 포지션을 명확히 잡아야 한다. 또한 매일 불러야 하는 공간의 이름은 신중하게 짓는다. 공간은 점차 연인이자 가족, 동료이자 선생님 같은 존재가 된다.
1.4 특정 레퍼런스를 좇을 필요는 없다. 성공한 공간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다. 참고가 필요하다면 기존 공간과 씬의 문제점이나 불만을 파악하고, 이를 반복하지 않는 데 집중한다. 적어도 이전보다는 더 나은 공간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1.5 공간은 운영자 개인보다 나은 존재로 두어야 하며, 사적인 도구나 수단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공간은 엄격히 내 것이 아니라 씬을 위한 도구이며, 운영자는 이를 다듬고 관리하며 자신보다 타인이 더 돋보이도록 조명을 비추는 사람이다.
2. 기본기와 자립
2.1 D.I.Y는 멋이 아닌 현실이자 필수다. 모든 일을 동시에 할 순 없어도, 운영자는 공간 내 가능한 역할들을 직접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전체의 흐름을 볼 줄 알되, 공연 하나를 만들 때 필요한 기획, 디자인, 음향, 진행 등 세부 역할에 들어가도 그 공백을 채울 수 있어야 한다.
2.2 공연 수익만으로는 공연에 들어가는 비용을 충당하기에 늘 부족하다. 그렇기에 동료의 협력과 희생에만 기대는 방식은 장기적으로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결국 운영자에게 자립은 단순한 기술이나 비용 문제를 넘어, 생존을 위한 태도이자 훈련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이 묵묵히 누적될 때 비로소 공간에 유무형의 고유한 이미지가 형성된다.
2.3 스스로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질문을 던지고 해결책을 찾는 훈련이 필요하다. 대신해 줄 사람이 없기에 끊임없이 기본기를 쌓아 나가는 과정에 익숙해져야 한다. 통제 불가능한 영역은 포기하고, 포기할 수 없다면 직접 치열하게 배워서 수행한다. 그렇지 않으면 변명과 남 탓만 남게 된다.
3. 책임과 연대
3.1 선택의 기준은 운영자 개인이 아닌 공간이 지향하는 가치와 성격이다. 당장 경제적 난관에 처하더라도 공간을 하나의 주체로 보고 그 요구에 귀 기울여 결정한다. 결정을 내린 후에는 흔들리지 않으며, 불안함이 있더라도 겉으로는 감춘다.
3.2 공간의 무게를 함께 짊어질 좋은 동료를 찾고, 그들에게 늘 고마운 마음을 가진다. 공간은 타인의 시간과 재능, 노력으로 굴러가므로, 그들의 작은 기여 하나에도 정성을 다해 예의를 갖춘다.
3.3 실무와 과정은 동료들과 나누되, 최종 결정권과 궁극적인 책임은 온전히 운영자 자신이 감당한다. 여건이 되면 쉬운 업무부터 믿고 맡기고, 무겁고 까다로운 책임일수록 운영자가 마지막까지 직접 쥔다. 기우뚱 무게가 기울 때 중심을 잡는 것은 결국 한 사람이다. 성과는 동료의 덕으로, 아쉬움은 자신의 몫으로 두는 태도가 공간의 지속성을 만든다.
3.4 플레이어들이 함께 공간을 운영한다면 밴드 토터스(Tortoise)처럼 동료들과 역할을 유연하게 바꾸며 서로의 리듬과 멜로디가 되어주어야 한다. 서로의 짐을 덜어주고 채워주는 품앗이는 현재의 씬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풍습이다.
4. 무대와 아티스트
4.1 무대 위 아티스트가 갖는 공연 시간은 단순한 40분이 아니라 훨씬 긴 시간이 담긴 결과물이다. 창작과 라이브 자체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정성을 다해 서포트한다. 또한, 가능한 최대의 수익을 아티스트에게 돌리는 것이 씬을 위한 최선의 투자다.
4.2 운영자는 공간과 아티스트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팬으로서 변함없이 존중을 유지해야 하며, 이러한 존중 없이 관객을 부르는 것은 무책임하다.
4.3 우리 역시 소수이기에, 주류에서 벗어난 장르나 아티스트의 가치를 꾸준히 우선시한다. 단순한 인기보다는 좋은 태도와 스탠스를 가진 아티스트에게 더 관심을 둔다. 이들은 단발성 흥행을 넘어 장기적으로 공간을 함께 만들어가는 동반자가 될 수 있다.
5. 씬과 커뮤니티
5.1 씬은 아티스트, 관객, 공간의 세 요소로 작동한다. 아티스트와 관객에 대한 고마움을 인지하며 운영자로서의 역할에 책임감과 자부심을 갖는다. 그리고 이 물리적 요소들을 이어주고 작동시키는 핵심은 커뮤니티다. 무형의 커뮤니티가 무너지지 않도록 늘 신경 쓰고 그 흐름을 망치지 않아야 한다.
5.2 관객을 임의로 선별하여 가려 받지 않는다. 공간은 기본적으로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하며, 판단과 선택은 운영자가 아닌 씬이 하는 것이다.
5.3 우리가 속한 씬은 서로가 서로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연대감을 동력으로 움직인다. 정신과 맥락이 없는 언더그라운드 문화는 일시적 유행과 다를 바 없으므로, 앞선 세대의 아티스트와 무브먼트에 대한 존중을 놓지 않되 과도한 환상은 지양한다.
6. 태도와 현실
6.1 좋은 공간이 곧 좋은 수익을 보장하지 않으며,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공간 유지에 돈이 부족하면 당당히 수익성 있는 일을 해도 무방하다. 다만 이를 공간의 가치와 무리하게 연결시키거나 어설픈 명분을 꾸며내는 것은 지양한다.
6.2 언더그라운드 씬은 운영자가 아티스트인 경우가 많지만, 공간 운영과 필드의 플레이어를 동시에 완벽히 뛰기는 어렵다. 두 가지를 병행하려다 이도 저도 아니게 될 수 있지만, 공간을 운영하며 시야를 넓힌 경험은 훗날 플레이어로 돌아갔을 때 큰 자산이 된다.
6.3 재정적 어려움이나 생활의 고충이 크고, 플레이어로서 미련이 남거나 내 것이 희생된다는 생각이 든다면 무리하지 않고 멈추는 것이 합리적이다. 극복 가능한 여건으로 회복되었을 때 다시 시작할 의지가 생기지 않는다면 거기까지인 것이다. 미련 없이 다른 길을 찾아도 무방하다.
6.4 타인의 강요로 시작한 일이 아니므로 억울해 할 필요가 없다. 남과 비교하는 순간 그저 그런 공간이 되어버린다. SNS나 외부 평점, 리뷰에 과도하게 의미를 두지 말고, 대중적인 평가보다 스스로의 기준에 한층 더 엄격해져야 한다. 우리는 맛집이 아니다.
6.5 놀고 싶다면 외부에서 풀고, 공간을 사적인 유희 장소로 쓰지 않는다. 공간 외의 삶은 최대한 단순하고 가볍게 비워 내어 에너지를 아낀다. 외부에 피해를 주지 않도록 유의하고, 운영자의 행동이 가벼우면 공간도 무시받게 되므로 내실을 다지며 조용히 보내는 편이 낫다. 재미없는 사람이 될수록 주변은 더 재미있어질 수 있다.
7. 성장과 지속
7.1 공간 운영은 단거리가 아닌 마라톤이다. 지속성과 성장을 위해 운영자 스스로 지루해지지 않도록 공간을 다양하고 유연하게 운용한다. 완벽한 완성은 없음을 알고 부족함을 계속 채워나가되, 에너지는 한정적이므로 완전히 멈추지 않을 최소한의 관성을 유지하며 체력과 시간을 안배한다.
7.2 프로젝트마다 최선을 다하고 아쉬움과 후회를 남기는 과정이야말로 다음 단계의 성장을 만든다. 그리고 불평과 불만은 다음 단계로 나아갈 동력이 된다. 대신 그 화살은 남이 아닌 자신에게 돌려 직접 해결점을 찾고 해소해 나간다.
7.3 즉각적인 답보다 찾는 과정에 집중할 때 더 좋은 질문과 본질적인 답을 얻는다. 손쉽게 답을 얻는 세상에서 오랜 고민 끝에 찾은 결론은 고유한 정체성이 된다. 어렵게 얻은 답일수록 실행과 언어는 최대한 간결하고 심플하게 풀어내어, 쉬운 본질을 어렵게 포장하는 함정을 피한다.
7.4 일이 잘 풀린다면 운과 주변 덕으로 여기되, 남의 성공을 단순한 운으로 치부하지 않는다. 수월하게 잘할 수 있는 ‘재능의 영역’을 썩히지 말고, 이를 자주, 많이 실행할 수 있는 ‘노력의 영역’과 결합시킨다.
7.5 한 자리를 오래 지키는 공간은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공간의 지속은 운영자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므로, 할 수 있는 바를 다했다면 그 다음은 씬과 커뮤니티에 온전히 맡기는 것이 운영자의 마지막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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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팁
1. 임대차보호법
1.1 상가임대차보호법상 최대 10년의 계약 연장이 보장되나, 임대인은 법정 한도인 매년 5% 내에서 임대료 인상을 요구할 수 있다. 매년 누적되는 인상폭은 장기적으로 큰 부담이 되므로, 시작부터 최대한 저렴한 월세의 공간을 찾는 것이 관건이다. 상권이 형성되지 않은 노후 건물이나 지하 또는 엘리베이터 없는 고층이 비교적 저렴하나, 소음 민원이 잦은 주택가는 피해야 한다.
1.2 상권 변동 리스크가 적고 임대료가 낮은, 익숙하고 오래된 동네를 택하는 것이 장기 운영에 유리하다. 동네 분위기의 변화가 적어야 공간의 색깔도 유지하기 쉽다. 단, 이러한 동네를 선택하는 데 있어 재개발 리스크는 감안해야 한다.
1.3 공간의 위치는 자신의 생활 반경이나 활동 범위와 가까운 곳으로 잡아야 한다. 길에서 소모되는 시간을 줄여야 하며, 공간에 생기는 예기치 못한 돌발 상황에 신속하고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공연장 관련법
2.1 일반음식점으로 등록된 공간에서 공연은 가능하나, 관객의 춤(몸을 흔드는 행위 전반), 노래, 별도의 무도 공간 제공은 법적으로 금지되며 착석이나 입석 관람만 허용된다. 이를 합법적으로 허용하는 유흥주점 등록은 세금과 시설 기준의 장벽이 매우 높다. 또한 비상업적 문화시설 공간은 춤과 공연 관람이 비교적 자유롭지만 주류나 음료를 판매할 수 없다. 연간 공연 일수가 90일을 초과하거나 연속하여 30일 이상 공연할 경우 정식 공연장으로 등록해야 하며, 소방법 등에 걸맞은 설비를 갖추어야 한다.
2.2 유흥주점이나 정식 공연장으로 등록이 어렵다면 두 개 호실이나 위아래 층을 임대해 한 곳은 일반음식점(주류 판매), 한 곳은 비상업 공연장으로 분리하는 것이 또 다른 방안일 수 있다. 관객이 술을 사서 공연장으로 이동하는 것은 합법이며, 사운드 관리와 기획의 확장성도 높다. 월세가 부담된다면 작업실이 필요한 동료들과 임대료를 나누어 주말에만 공연장으로 셰어하는 방안도 유효하다.
2.3 공간의 활동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법적 요건을 근거로 디테일한 신고를 넣기도 한다. 조사를 담당하는 공무원조차 법령 이해도가 부족한 경우가 많으므로, 억울한 처벌과 조사 트라우마를 피하려면 운영자 스스로 관련 법규를 완벽히 숙지해야 한다.
3. 방음 설비
3.1 방음 공사는 운영 중간에 보강하기가 매우 까다롭다. 공연이나 이벤트가 잦은 공간을 지향한다면 첫 설계와 시공 단계에서 예산과 노력을 방음에 최우선으로 할애해야 한다.
3.2 공간이 작을수록 소리를 제어하기 수월하다. 규모가 커질수록 소방법과 건축법 기준 충족을 위한 설비 부담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므로, 필요한 최소한의 크기로 시작하는 것이 현명하다. 지하는 방음에는 유리하지만, 상시적인 보건 및 환경 관리에 불리할 수 있다.
3.3 반복되는 소음 민원과 경찰 개입은 운영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의 치명적인 스트레스를 준다. 방음에 최선을 다하되, 주변 이웃과는 평소 정중한 인사와 작은 선물로 우호적인 관계를 쌓아두어야 한다. 친분이 생기면 선을 넘지 않는 소음은 어느 정도 용인해 주는 경우가 많다.
4. 기타
4.1 언더그라운드 수익 구조로는 고가 장비를 유지하기 어렵고 거친 라이브 환경상 고장도 잦다. 기기의 한계점을 파악해 운용하되, 반복되는 수리에 비용을 쓰기보다 성능 좋은 가성비 장비를 주기적으로 교체하며 사용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다.
4.2 동료들과 직접 손으로 만든 독창적인 인테리어는 (특히 오픈 초반에) 뮤직비디오나 화보 촬영의 대관 등을 통해 쏠쏠한 추가 수익원이 되기도 한다.
4.3 공간 운영의 실무는 사실상 고된 육체노동에 가깝다. 운영자의 건강이 곧 공간의 자산이자 미래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시간과 여유 자금이 생긴다면 최우선으로 자신의 체력을 돌보는 데 투자한다. 책임지는 운영자가 건강하게 버텨줄 때 공간의 생명력도 비로소 길어질 수 있다.
이병재 @qudwoqudwo
이병재는 공간 운영자이자 미술작가/디자이너로 아티스트 콜렉티브 ’파트타임스위트‘(2009-2013)를 결성해 활동하였고 ’꽃땅‘(2010-2013) 을 운영하였다.
2015년부터 현재까지, ’신도시‘와 ’미도파‘에서 디렉션과 프로젝트 기획, 디자인, 인쇄물 및 음반물 제작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