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율 — 60유로 (안)사용 보고서
△은 여행을 잘한다. 여행을 잘하는 게 뭔지 묻는다면 뭐라 답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여행을 못 하는 건 확실하다. 나는 여행지에서 자주 길을 잃거나 시간을 가늠하지 못하고, 망설임과 걱정으로 길 위에서 헤매는 시간을 어려워한다. △은 그렇지 않은 사람처럼 보인다. 그가 여행을 통해 길어오는 것들은 항상 감탄을 자아냈고, 그가 주의를 기울이는 장소, 시간, 사물들은 생명력을 얻었다. 어떤 여행지에서도 종종거리는 나는 그 점이 항상 부러웠다. 그런 그가 곧 베를린으로 떠나는 내게 지령을 내리겠다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 너무나도 기뻤다. ‘△’이 시키는 대로… 한다고? 내가 아는 최고의 여행 천재가? 이보다 더 완벽한 트레블 플랜이 존재한 적은 없었다. 가슴이 뛰었다. 이번에야말로 멋진 여행을!
그는 베를린의 어디에 가서 무얼 할지 적은 문서를 곧 전달하겠다며 출국 직전의 나에게 60유로가 든 봉투를 건넸다. 여기서부터 우리의 차이가 드러났다. 아직 환전을 하지 못했던 나는, 이 돈을 우선 도착해서 당장 현금이 필요한 일에 쓰고, 지령 수행을 위해 다닐 때 60유로만큼 카드로 결제하면 되겠다고 말했는데, 이 말을 들은 △은 깜짝 놀라 절대 그러지 말라고, 꼭 이 봉투 안의 현금을 실제로 써서 지령을 수행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거스름돈도 남겨오라고 했다. 나는 이때 큰 깨달음을 얻었던 것 같다. 하하…
베를린에는 4주 머물렀다. 즐겁고도 정신없는 4주였다. 올해 상반기의 고된 일정으로 쌓인 피로를 푸는 데 혼자 한동안의 시간을 보내고, 베를린에서 신세를 지고 있던 ○가 출장에서 돌아온 후 그와 외출하거나 공연을 보러 다녔다. 곧 △에게서 ‘60유로 사용법’이 도착했다. 지시 사항을 하나 하나 읽어 내려가던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는데… 며칠 전 과식으로 배를 뚜드리며 괴로워하던 중 ○가 산책을 제안했고, 어디를 가는지도 모르는 채 그의 뒤를 따라 한 시간가량의 산책을 다녀온 참이었다. △이 보낸 문서의 장소들은 신기하게도 그 산책 루트에 거의 포함되어 있었다. 비록 문서 상단에 ‘전체 루트를 미리 계획하지 않을 것’이라고 적혀 있기는 했지만, 실행하기만 하면 되는 구체적 계획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두근거리는 나를 제어하기는 어려웠다. 준비는 다 됐다. 나는 단 하루의 시간을 내기만 하면 됐다.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단 하루.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나는 받은 미션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시간 운용에 능숙하지 않은 내가 이번에도 시간 배분에 실패해 버린 것이다. 이럴 수가… 단 하루의 시간을 내지 못했다는 슬픔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나를 괴롭히고 있다… 너무나도 커다란 상심… 그와 약속한 하루의 시간을 내지 못했기에, 남은 기간 내내 나는 △의 말들에 접속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디를 가도 지령 속 단어들이 나를 따라다녔다. 강가, 크루아상, 새, 동전, 영화관, 베트남 쌀국수, 레드 벨벳, 떠오르는 누군가를 위한 물건을 사기, 가장 웃기게 생긴 공산품 초콜릿, 호텔, 무스타파 야채 케밥, 망설임 없는 하루, 행운.
베를린을 떠나는 날이 다가오자 더 초조해졌고, 남은 기간 동안 새롭게 무언가를 수행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그동안의 여정을 거슬러 올라가며 내가 경험한 것들과 지령의 교차점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강가? 수영하러 호수에 다녀온 적 있음, 크루아상? 첫 번째 주에 먹음, 영화관? 지나가다 봄, 초콜릿? 곰돌이 모양 영양제 캔디로 대체(?),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이런 해괴망측한 수행이라니… 적으면서도 부끄럽다. 받은 현금 딴 데 쓰고 카드로 결제하면 되겠다는 태도에서 많이 벗어 나지 못한 듯싶었다.
거의 마지막까지 해결되지 못한 채 머릿속에 남아있던 단어는 ‘되너’였다. 베를린에서 되너 먹기가 뭐 그리 어렵겠나 싶었지만, 생각보다 먹을 기회가 좀처럼 없었다. 그러다 공연 인터미션 30분 동안 식사를 마쳐야 하는 날이 있었는데, 원래는 커리부어스트를 먹으러 가려다 시간이 없어 케밥 집으로 방향을 틀었다.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빨리 먹는 간단한 음식을 주문하는 일행들 옆에서 나 혼자 커다란 되너를 주문했다. 밥을 느리게 먹고 잔반 처리에 민감한 나로서는 쉽지 않은 선택. 주문한 되너를 받아들고 새어 나온 미소가 만든 입술과 볼 근육의 상승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렇게 순수한 기쁨의 미소를 지은 적이 얼마나 있었던가? 반도 못 먹은 되너를 포장해 공연장으로 돌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어떤 것을 수행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되너!
지령이 오기 전에는 어떤 지령이 도착할지 궁금해하고, 도착한 후에는 어떻게든 그 곁에 닿으려 전전긍긍하며 여행자 △을 닮아보려 노력했다. 문서의 마지막에 그는 ‘망설임 없는 하루가 되길’, ‘그리고 행운이 따르길’이라고 적었다. 이 문장들을 어려워하는 나에 대해, 그리고 이 문장들이 불러일으키는 마음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 나는 아직 새로운 태도의 여행자가 충분히 되지는 못한 것 같지만, 혼자 여행지에서 길을 잃거나 뭘 해야 할지 몰라 초조할 때 내 손에 한 번 쥐어졌던 지령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 받은 60유로는 봉투째 그대로 들고 왔다. 언젠가 손안의 현금을 온전히 소모하는 감각을 충만하게 느낄 수 있는 하루를 만들 수 있기를 바라며.
조율 @tunerplease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음악가, 즉흥 연주자. 조율은 소리와 언어, 세계가 관계 맺는 과정에서 생성된 편린들의 가능성에 관심을 두고 그들이 놓일 자리를 만든다. 또한 닥소폰 즉흥 연주자로서, 소리를 수행하는 신체, 그리고 연장된 신체로서의 악기가 라이브 현장의 시공간을 점유하는 광경을 관찰한다. 앨범 《Earwitness》(2021)를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