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준 — 말하는 공구리

최용준 — 말하는 공구리

2025년 12월14일 서울 강동구 올림픽파크포레온 벤치에 쌓인, 서리 위에 적힌 하트

서리 위 하트 

 

신년 앞두고 빨강 몰스킨 위클리 다이어리 하나 샀다. 4만5000원. 너무 비싸. 그렇지만 새해 각오에 비하면 싼 것 아닌가. 2026년 꼭 좋은 시 쓰겠다는 이글거리는 마음 따라 추위에도 활활 걷다 흰 하트 여럿 보았다. 대단지 신축 아파트 피크닉 벤치에 내린 서리 위에 사랑이 몇 개 있다. 하트의 배경이 된 눈가루들 지나쳐 나아가는데—어째서, 별안간, 나는, 차게, 식는다. 두근두근은 커녕. 

 

2025년 12월14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기자선수촌 아파트 담벼락에 적힌 싱싱. 싱싱이라고 적혔지만 전혀 싱싱하지 않은 낙서는 우리 대부분의 기억처럼 점점 흐릿해진다.

 

낙서하는 이유는 여럿이지만, 아마 가장 강렬한 충동은 이 순간 여기 새기겠다는 마음일 것이다. 하지만 콘크리트, 철, 플라스틱 같은 외장재 위 글자들은 낙서를 적을 때의 의지와 달리 위태로운 처지다. 유성 마커라도 비바람과 태양 아래 글자는 흐려지고 날아간다. 건물주가 씩씩대며 페인트로 덧칠하면 그때 그 마음 그 기록은 영영 사라진다. 하지만 금세 사라질 것을 알면서 쓰는 눈 위의 낙서도 있다. 싱싱한 제철 농산물 같은 낙서라고나 할까. 

매해 반복되는 새해 계획은 매년 거의 다르지 않다. 내가 바라는 소망은 여러 차례 우글거리다 시간에 따라 서리 위 낙서처럼 힘을 잃을 것만 같다. 아, 곧 사라질 게 뻔하다. 1월 첫 주가 막 시작되는데 벌써부터 가벼이 훨훨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나. 이 불안. 올해도 지난해와 같아선 안 되는데 아마 늘 그랬듯 비슷해질 것만 같아. 안 돼. 씨발, 안 돼. 질 순 없어. 그렇게 훅 불면 저 멀리 둥둥 떠갈 것처럼 작아지려는데, 노랑 모과 몇 개 보았다. 

2025년 12월 14일 송파구 서문교회 근처 지상 전력개폐기 위에 놓인 모과, 2025년 12월 17일 세종시 교육부 근처 게시대에 올려놓은 모과

 

늦가을 열매 맺는 모과가 전력개폐기 위에, 현수막 게시대 위에 놓였다. 땅에 떨어진 모과를 누군가 아깝고 가여워 올려두었다. 서울에서 예배를 마치고 나온 교인이나, 세종에서 밤 늦게 퇴근하는 공무원이나, 이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은 바닥에 나뒹구는 향긋한 모과를 내버려두지 않고 고이 세워두었다. 나는 모과를 가져갈까 하다 그만 두었다. 줄지어 있는 모과가 서리 위 뭉친 하트와 달라 보여서. 조금 더 단단한 것 같아서. 누군가 모과를 보고, 그들을 잠시 매만지고 내려 놓았으면 해서. 집으로 향하면서 손 끝을 코 밑에 대고, 찬 공기 속 더 깊이 숨을 쉴 수 있다는 것을 느꼈으면 해서.

2013년 6월 22일 경기 수원시 영통구 광교호수마을 호반써밋 자전거 보관소에 쌓인 먼지 위에 적혀있었다. 

 

12년 전 자전거 보관소 먼지 위에 아이들이 적어놓은 낙서를 본 적 있다. 고양이를 찾았으니 주인은 찾아가라는 종이가 붙어있었고, 그 곁에 초여름 흙먼지 위로 잉 찾아가세요! 불쌍애요 라고 적혀 있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찾았어요 고마워요 라고 답했다. 

고양이 보호하는 사람과 모과 주워 올려둔 사람은 어쩐지 같은 사람 같다. 나는 새해에 잃었다가도 다시 찾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버린 걸 다시 거두고 싶다. 그러니까 눈 위에 새긴 가벼움도 손 끝에 까맣게 묻는 먼지도 다 괜찮아. 다 괜찮아. 

 

2013년 6월 22일 경기 수원시 영통구 광교호수마을 호반써밋 자전거 보관소에 쌓인 먼지 위에 있는 하트와 사랑해

 

겨울 서리와 여름 흙먼지 위에 새기는 낙서와 새해 다짐은 거리가 멀어 보인다. 한쪽은 위태롭고 한쪽은 단단해 보이지만 사실 그 마음이 그 마음일 것이다. 그 사랑이 그 사랑인 것처럼, 아무리 새롭게 시작해도 언젠가 헤어짐이 있다. 반대로 쉽게 쉽게 하려다 진지해지는 것들도 있다. 어떤 길이든 모과를 모아둘 수 있다. 올 한해도 애쓰다 보면 하나 하나 자리잡는 모과의 향이 있을 거고, 누군가는 그곳에 이끌린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헛헛한 오늘도, 눈을 감으면 눈물이 흐를 것 같아 텅 빈 하늘만 보는 날도, 모두 흘러간다. 그 아래 겨울철, 걸을수록 마음 속 알알이 무엇인가 자란다. 무겁다가도 툭툭 떨어진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내 안에서 사라지지 않고 다시 묻혔다가 다시 깨어난다고 믿으면서, 그러니까 위태롭거나 잃어버려도 다시 줄줄이 반복하면서, 눈 위도 먼지 위도 귀히 여기다 보면.

 

최용준 @talkingconcrete

시(詩)와 꿀벌을 좋아한다. 서울을 떠나고 싶다. 
파이낸셜뉴스 기자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