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과수 — 13년간 일기를 썼더니 생긴 일

무과수 — 13년간 일기를 썼더니 생긴 일

2013

인스타그램에 가입했다. 낯선 사람들이지만 감성이 비슷한 사람들에게 적절한 거리에서 내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중학교 때에는 노트에, 고등학교 때에는 블로그에, 대학교 때에는 페이스북에 썼던 일기를 인스타그램에 적기 시작했다.

참고로 그 당시에는 사진을 정방향으로 단 1장만 겨우 업로드할 수 있었다. 그때는 특별함과 평범함이 나뉘지 않고 공평했다. 모두가 자신의 아주 사적인 일상을 업로드할 뿐이었다. 그날의 기분, 생각, 저녁 메뉴 같은 아주 시시콜콜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2017

a. 서울 상경해서 처음으로 구했던 집이 장마가 시작되자 물이 샌 벽지로 얼룩졌다. 다행히 반지하 집은 단기 계약을 했던 터라 계약이 끝나기 한 달 전, 나는 이사 갈 집을 미친 듯이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집을 구하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을 때, 운명처럼 한 집을 만나게 된다.

 작은 캐리어 2개와 상자 1개가 짐의 전부였던 서울에서의 첫 집

b. 힘든 시간 끝에 만난 집이라 그런가 아주 평범한 일상에서 특별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눈을 뜨면 침대에 걸터앉은 햇살이, 정해진 시간에 울려 퍼지는 건너편 교회의 종소리, 사계절 다른 풍경을 보여주는 창밖의 감나무까지. 바삐 돌아가는 경쟁사회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오롯이 쉴 수 있는 곳이 집이라는 것을 점점 더 깨닫기 시작했다.

 

c. 기록에 재미를 붙이니 모든 이야기들이 흥미롭게 보였다. 처음에는 #무과수의집 으로만 시작했던 기록이 직접 차려 먹은 음식에 관한 이야기인 #무과수의식탁, #무과수의여행 등 다양한 콘텐츠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덩달아 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도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d. 주인의 사정으로 갑작스럽게 이사 통보받게 됐다. 남은 시간을 슬퍼하며 보내기보다는, 더 많은 사람과 이 공간을 기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곧바로 인스타그램을 켜 글을 하나 올리게 된다.

‘무과수의 집에 놀러 오세요!’

그 당시 낯선 사람들을 무턱대고 집으로 초대하는 내가 무척 신기했던 한 매거진 기자가 연락해 왔다. 생애 첫 인터뷰였다.

 

2018

비슷한 시기에 ‘오늘의집’이라는 회사에 30명일 때 입사하게 됐고 500명이 될 때까지 함께 성장 했다. 집들이 콘텐츠를 발행하는 아주 단순한 에디터 업무를 시작으로 커뮤니티 <오하우스>를 만들고, 브랜딩을 담당하면서 후회 없을 만큼 나의 삶에서 가장 치열하고 열정적인 시기를 보냈다.

 

역대 가장 많은 ‘좋아요’를 받은 게시물



2020

2019년 첫 책 <무과수의 기록> 시리즈를 독립축판으로 출간했고, 기록을 이어온 지 8년 차에 팔로워가 1만 명이 되었다. 평범한 일기를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다니. 그저 얼떨떨할 뿐이었다. 묵묵히 나의 방식대로 시간을 쌓아 올린 것에 대한 선물인듯, 곳곳에 흩어져있던 나와 비슷한 결의 사람들이 곁으로 다가와 주었다. (그들은 고요하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단단한 응원을 보내주었고, 우리는 그렇게 함께 자라났다)

 

2021

a.코로나를 기점으로 세상은 급속도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오프라인에서 온라인 중심으로 많은 것들이 옮겨졌고, 인스타그램도 그 파도를 타고 새로운 기능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마냥 신기했지만 점점 나의 기록 방식과 속도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중심을 잡지 않으면 이리저리 휩쓸려다니다 끝이 날 것만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b.기록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더 많은 팔로워나 높은 조회수를 얻는 것보다, 땅에 발을 딛고 직접 부딪히고 경험하며 나만의 세계를 쌓고 확장해 나가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 뒤로 수 많은 고뇌 끝에 나만의 기적의 순환구조를 발견하면서 생각과 행동의 구조가 단순해졌다. 

 

좋아하는 것을 진심으로 즐기면서 꾸준히 기록한다 → 결과와 상관없이 만족스럽다 → 크던 작든 기회가 생긴다(그렇지 않더라도 나는 이미 즐겁다) →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한다 


2026

인스타그램을 운영한 지 올해로 13년 차가 되었다. 물론 나 역시 이리저리 흔들리며 변한 것도 있겠지만, 나름의 고집과 기준을 가지고 여전히 고유한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놀랍게도 이렇게나 평범한 이야기를 (밀도와 순도 높은) 11만 명이 지켜봐 주고 있고, 그 사이 8권의 책을 썼으며 곧 신간도 나온다. 건강이 일보다 우선이고, 1년에 한 번은 원하는 나라로 한 달씩 여행을 떠나는 삶을 살고 있다. 상상속의 집을 짓는 것 빼고는 얼추 다 이룬 것 같다(제철 채소 챙겨 먹을 때 가장 행복한 편)

모든 것은 결과론적인 이야기니까. ‘이렇게 해야지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를 이야기하고 싶은 건 전혀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될 줄 몰랐습니다’에 더 가깝다. 인생은 여전히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어서, 오늘도 내 오른쪽 팔에 새긴 타투처럼 살아가 볼 뿐이다.

‘I FOLLOW WHERE MY MIND GOES’

 

무과수 @muguasu

1992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필명 무과수는 어루만질 ‘무’, 열매 맺는 나무인 ‘과수’를 더해 만든 이름으로, 가진 재능을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데 쓰고 싶다는 뜻을 담고 있다. 책 《무과수의 기록》 시리즈, 《집다운 집》, 《안녕한, 가》 등 을 펴냈으며,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직업을 갖고 싶어 일과 딴짓의 경계를 허물고 버무려지는 삶을 추구하며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