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소윤 — 12일간의 뉴욕 일주(feat. 코미디 유학)

원소윤 — 12일간의 뉴욕 일주(feat. 코미디 유학)

이륙

 

1일 차. 

취업 준비생 시절, 인·적성검사를 치렀고 그 결과 ‘외국인 혐오’를 진단받았다는 사실이 문득 떠올랐다. 내가 정녕 뉴욕에 가도 되는 걸까. 뉴요커들을 혐오하게 되려나, 아님 외국인이 된 나 자신을 혐오하게 되려나. 이런 생각 하며 도착한 숙소는 영화 〈프랭키와 쟈니〉 주인공들이 살고 있을 것 같은 워크업아파트였다. 프랭키와 쟈니… 그들을 생각하며 나는 내 안의 외국인 혐오를 말살했다. 사랑하다 떠나리.


(1) 숙소 앞 거리 (2) 숙소 (3) 숙소 현관

 

2일 차. 

St. Marks Comedy Club에서의 오픈마이크. 

어린 코미디언의 차례. 남미 여자가 본인 취향인데 근래 베네수엘라 여자들이 저렴해져서 좋다고. 적잖이 취해 보이는 중년의 코미디언이 객석에서부터 소리쳤다. “그런 농담 하지 마.” 어린 코미디언이 딱 버티고 서서는 맞대응할 줄 알았다. 온라인에서 본 ‘헤클러 참교육 영상’처럼. 근데 얘가 하는 말이 “앗, 불쾌했다면 죄송합니다.” 오, 깜짝이야. 본 적 없는 걸 봐서 놀랐다. 뭔가 다른 걸 보기 위해 내가 이곳에 오긴 했다.

3일 차. 

Comedy Cellar 공연. 

콜린 퀸이 두 번째 순서로 등장했다. 한때 꼬장꼬장했지만 이제는 제법 너그러워진 노인의 느낌. 문명비판적 농담이 꽤 있었고 펀치라인 밀도가 높진 않았지만 이런 코미디언도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이 거물 다음에 대체 누가 나오려나 내가 다 긴장했는데 그리어 반즈가 나왔다. 콜린 퀸과는 정반대 스타일로 실없는 농담이 이어졌다. 비트박스도 해주시고 다람쥐 흉내도 내주시고 너무 잘해주시는 섹시 코미디언. 홀딱 반했다.

4일 차. 

애착 코미디언 조 리스트의 공연을 보러 갔다. 

용기내 맨 앞자리에 앉았는데 무릎에 올려놓은 내 백팩을 연신 흘끗대더라. 공연 중에 아랍계 남자가 백팩을 메고 들어오자 조가 그 남자와 나를 번갈아 보며 소리쳤다. “외로운 백패커가 왜 이리 많은 거야? 불안하게시리. 가방 검사 좀 해보자.”

(1)The Stand (2)The Stand, Joe List

 

5일 차. 

술집에 갔다. 

음악 공연이 시작되었고 바에 앉아 열정적으로 몸을 흔들어 젖혔다. 바로 옆자리 백인 젊은이는 뻣뻣하니 움직이질 않았는데 발은 계속 굴러댔다. 바닥의 진동이 내게 다 전달되었다.

 

6일 차. 

새하얀 예배당을 발견했다. 

하양 수도복을 입은 사제가 허리춤에 밧줄 같은 걸 두른 채로 계단에 서 있었다. 뉴욕 한복판에서 성직자로 산다는 건 대체 어떤 의미일까. 성직자를 만날 때마다 남편이 떠오른다. 명리학자가 말하길, 나 같은 인간은 ‘성직자’ 사주와만 사랑할 수 있다고. 공교롭게도 남편은 성직자 사주다.


(1) 아침 거리 (2) 저녁 거리

 

7일 차. 

Laughing Buddha Comedy. 술을 주문했다. 

카드 리더기를 다루는 솜씨를 보아하니 이런 종류의 아르바이트는 처음인 듯한 종업원. 순간 그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난처한 기분을 자주 느끼며 살아서. 숙소로 돌아와 한국인 호스트와 짧은 대화를 나눴다. 뉴욕 생활 5년 차인 그는 야간 병원 직원으로 스탠드업 코미디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단다.

“여기 사는 아시안들한텐 아무래도 관심 밖일걸요.”

나의 신분이 자각되었다. 그래, 나는 여유만만한 여행자이지….

8일 차. 

박물관 구석에서 쪼그려 앉아 쉬다가 직원이 다른 직원을 유혹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매력적인 아프리카계 남자가 마찬가지로 매력적인 아프리카계 여자에게 말했다. “넌 레즈비언도 아니잖아.” 이것이 뉴욕식 플러팅인가. 남자가 벽을 딱 짚고 서서는 벽에 기댄 여자를 내려다보며 회유했다. 잘될 게 분명해, 예감하며 기념품샵에 갔는데 거기 직원 둘도 속닥거리길래 여기는 사내 분위기가 왜 이 모양인가 했다. 그런데 더 들어보니 아예 다른 내용. 남자 직원이 여자 직원한테 어디 출신인지 물었는데 뉘앙스가 다소 무례했는지 여자 직원이 날선 말투로 답한 것. “그래, 난 이곳 사람이 아니야. 우크라이나에서 왔고 그게 자랑스러워.” 남자가 급히 수습했다. “그야 나도 이민자의 후손이야. 그게 멋지다고 생각하고!”

Museum of Natural History NYC

 

9일 차. 

숙소 뒤뜰에 처음 가보았는데 아시안 여자가 책을 읽고 있었다. 

구석구석 구경하려고 여기저기 문을 열어젖히는 내게 여자가 다가와 말했다.

“방금 거긴 내 집이야.”

“아, 미안. 그냥 좀 둘러보려다가.”

“괜찮아, 귀여웠어.”

요즘 귀엽다는 소리를 부쩍 자주 듣는데… 심지어 뉴욕에서까지?


 

10일 차. 

멕시칸이 운영하는 다이너에 갔다. 

멕시칸 배달원들이 모여 앉아 대기를 타고 있었다. 채소구이 랩이 따끈하니 맛있었다. 수사학 박사과정 중인 친구를 만났다. ‘미국 스탠드업 씬의 우경화’에 대해 논문을 쓴다고. 그와 관련해 한참 대화했다. 헤어질 무렵, 친구가 그랬다.

“너, 뉴욕을 좋아하는 것 그 이상으로 보이네.”

에이, 설마 내가 뉴욕을 사랑하기라도 한다는 건가.

11일 차. 

이게 무슨 일인지 오픈마이크 공연장에 죄다 남미 사람뿐이었다. 

앵글로색슨은 단 한 명, 호스트 역할의 패트릭뿐. 참고로 패트릭은 히틀러가 단번에 승인할 것처럼 생긴 청년으로 남미 오픈마이커들의 이름을 발음하기 어려워했다. 단체로 온 게 아니라고들 하는데 너무나 끈끈했고 긍정과 사랑의 에너지가 흘러넘쳐서 이상적인 명절을 맞이한 기분이었다. 와중에 무대에 올라 패륜적인 농담을 해버렸고 씨알도 안 먹혔다.


12일 차. 

2층 버스 타고 야경 투어를 했다. 

해설은 백인 신사가 해주셨는데 배우로도 활동하며 〈더 마블러스 미스 메이즐〉에도 출연하셨다고. 스탠드업 코미디를 시작했을 무렵 푹 빠졌던 드라마인데 어쩜 이런 우연이? 차이나타운을 지나다 악바리 근성이 느껴지는 깡마른 아시안 청년들을 보았다. 청주 갈비탕집에서 일하고 있을 오빠가 생각났다. 한국으로 돌아가 내가 보고 들은 걸 말해 줘야지. 단 한 번의 여행으로, 그것도 하필 미국 여행으로 너무 많은 걸 느껴버리고 싶진 않았지만.

   

착륙

원소윤 @barefoot_won

스탠드업 코미디언이자 작가. 『꽤 낙천적인 아이』(2025)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