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윤이 — 소설 무대 탐색
내가 쓰는 글을 비롯한 많은 소설은 허구의 시공간, 즉 무대에 인물들을 세운 뒤 곳곳으로 굴리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가끔은 무대를 설치하고 정교하게 꾸미는 일 자체가 소설이 되기도 한다. 종종 나는 이 일을 더 잘 해내고자 실제의 장소를 탐색한다. 소설 속 무대와 가장 비슷한 성질을 지닌 장소를 찾아 살핀 후 거기서 겪은 감각이나 풍경 들을 언어로 옮기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실제 공간이 오염 또는 왜곡되고, 허구의 장소와 뒤섞이며 멋대로 변화하기를 고대하기도 한다. 앞서 무대라는 명칭을 가져왔으니, 해당 과정 또한 소설 무대 탐색이라고 불러보겠다.
가령 나는 지난 11월 발표한 단편소설 「굴은 구르지 않는 돌」을 쓰기 위해 국내외의 동굴 두 곳을 다녀왔다. 이 소설은 오랜 세월 감춰져 있던 동굴에 들어가는 세 사람 이야기로, 그들이 동굴을 샅샅이 살피려면 작가인 내가 먼저 동굴의 ‘동굴 됨’이 무엇인지 알아보아야 했다.
지난가을 나는 대한민국 경기도의 광명동굴 그리고 태국 치앙마이의 왓 탐 치앙다오 동굴사원을 방문했다. 동굴이라는 명칭을 공유하고 있긴 하나 양쪽 장소는 서로 매우 달라, 하나의 부류로 묶기 좀 멋쩍은 지경이다.
먼저 방문한 광명동굴은 1912년 일본의 자원 수탈을 위하여 만들어진 광산을 2011년 광명시가 매입하여 관광지로 변모시킨 장소다. ‘동굴 테마파크’로 이곳을 소개하는 여타 관광 사이트의 글에 걸맞게,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각종 채도의 빛으로 번쩍이는 플라스틱 꽃밭과 광섬유 장식을 만날 수 있었다. 잘 다듬어진 길을 따라가자 협소한 규모의 수족관(지하의 조그만 어항에 갇힌 어류들을 보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었다)과 레이저 쇼가 벌어진다는 공연장, 폐광 시기의 역사를 기록한 전시관 들이 연이어 나타났다.
그중 하이라이트라 할 만한 것은 그야말로 불현듯 나타난, 〈반지의 제왕〉과 〈호빗〉 실사영화 시리즈에 등장한 골룸 그리고 용의 조형물이었다. 동굴의 한쪽 면을 빼곡히 채운 이 거대한 조형물은 무려 〈반지의 제왕〉 영화의 시각효과를 담당한 뉴질랜드의 웨타 디지털 스튜디오와 협업하여 만든 것이다. 41미터 길이의 용 조형물은 웨타워크숍이 두 달간 제작한 “국내 최대의 용”으로 소개되어 있다(국내 최소의 용은 어디 있을까?). 나는 벽을 따라 빙빙 돌며 경기도 가학산의 굴속에서 20세기 채굴과 수탈의 역사 그리고 21세기를 연 판타지 시리즈의 유산이 교차하는 장면을 누차 되새겼다.
지역별 와인을 파는 통로를 지나 동굴을 나설 무렵, 나는 내 소설에서 이제 갓 발견된 동굴을 떠올렸다. 허구의 동굴은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그 변화가 방금 내가 통과한 실제의 동굴이 겪은 변화와 마찬가지로 멋대로 자라나고 뒤섞이는 형태일지도 궁금해했다. 이런 변화의 양상만 보면 허구와 현실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란 딱히 다르지도 않았다.

반면 한 달 후 들른 왓 탐 치앙마오 동굴사원은 종교적 공간이라는 특성 탓인지 내부 공사를 최소한으로만 진행한 상태였다. 동굴 초입에는 관광객을 위한 통행로와 조명 그리고 돌을 깎아 만든 신상(여기서도 똬리를 튼 거대한 용을 만났는데, 불교 신화에서 반인반사의 존재로 등장하는 나가नाग로 추측한다)이 있었지만, 한층 깊숙한 내부는 동굴의 자연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선지 최소한의 조명도 설치하지 않았다. 고로 나 같은 외부인이 그 안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사원에 대기 중인 원주민 가이드와 동행해야 했다. 일행이 없던 나는 램프를 든 가이드와 단둘이 동굴의 어둠 속에 발을 디뎠다. 초면인 가이드와 처음 동굴에 들어서는 소설 속 인물들과 똑 닮은 처지가 된 것이다.
그 안에서 본 광경들은 이번 태국 여행을 망라해 가장 아름다우며 오싹오싹한 기억들로 남아 있다. 동굴 내부에 완전히 도가 튼 듯 보이던 여성 가이드는 지글지글 소리가 나는 램프로 동굴 곳곳을 비췄다. 그는 머리가 부딪치지 않게 조심하라는 말을 거듭하면서, 그의 조상들이 기기묘묘한 형태로 자라난 종유석과 석순에 어떤 이름을 부여했고 또 모셨는지 설명했다. 우리는 세 마리 코끼리가 나란한 모습을 닮은 석순, 뱀이라는 이름과 걸맞게 우둘투둘한 바닥 무늬, 가부좌를 튼 인영을 연상시키는 종유석 곁을 지나갔다. 몇몇 돌에는 꽃을 땋아 만든 목걸이나 모조 보석 등이 걸려 있었다.
나는 가이드를 따라 돌들에 합장했고, 종종 고개 돌려 깜깜한 굴속을 바라보았다. 우리에게 주어진 불빛은 가이드가 든 램프 하나뿐이었으므로 뒤를 돌면 그야말로 순수한 어둠에 파묻힌 굴을 볼 수 있었다. 가이드의 말을 인용하면 “미국의 축구 경기장 네 배”만 한 굴도, 단칸방만 한 굴도 그림자 속에 도사린 채였다. 흔들대는 불빛이 천장과 바닥을 스칠 때면 수많은 박쥐와 귀뚜라미들이 날거나 기어다녔다.
그날 나는 바짓단과 엉덩이, 가방에 골고루 진흙을 묻혀가며 동굴을 빠져나왔다. 종내에는 굴속을 흐르는 강을 건너기 위해 신발을 벗었다. 물길을 철퍽철퍽 지날 때는 내 소설 속 굴이 본디 어떤 모습이었을지, 굴속의 푹 젖은 어둠과 거기 잠긴 생물체들이 등장인물들에게 무슨 순간을 가져올지 상상했다. 이 모든 시간을 힘주어 표현한다면 실제 몸이 지나온 장소와 아직 글자로 쓰이지 않은 무대가 교차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과연 이 만남은 제대로 성사되었을까?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탐색은 드러나지 않은 사물이나 현상 등을 찾거나 밝히고자 살펴 찾는 일이다. 동굴에 가고, 동굴에 대한 소설을 쓸수록 알게 된 것은 내가 여전히 ‘동굴 됨’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애당초 소설 무대 탐색은 세계의 ‘세계 됨’이 무엇인지 살피고자 지글지글 소리 나는 램프를 곳곳에 향하고, 마침내는 실패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곳곳에 램프를 디밀고 있으나 눈앞은 대체로 어둡다. 당장에는 이 어둠이 소설이 굴러가는 방향과 매우 밀접하게 닿아 있다는 느낌도 든다.
함윤이 @yourinkstone
소설을 쓴다. 지은 책으로 소설집 『자개장의 용도』, 단편소설 『소도둑 성장기』『위도와 경도』 등이 있다. 허구가 만들어지고 변화하며 확장되는 과정에 관심을 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