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 Qui — 이건 원래 제 일이 아니었는데요
한국 인디씬에 발을 담근 지도 어느덧 15년이 넘었다.
중학교를 막 졸업하고 그림을 그리다가 음악에 꿈을 품게 된 내가, 훗날 영상을 본업으로 삼고 상업 콘텐츠를 만들게 될 거라고는 상상이나 했을까.
‘싸이월드를 꾸미며 UCC를 만들던 경험이 어느 순간 누군가의 의뢰를 받아 돈을 받으며 영상을 만드는 일로 이어졌다.

과거 음악 스케치 목록. 1~2초 만에 지은 제목들에서 그 시절의 풋풋함이 느껴진다.
그림보다 어려운 것들
소극적인 성향의 내가 여러 팀과 협업하며 작업하는 건 여전히 쉽지 않다.
연출을 시작할 때만 해도 좋은 그림만 떠올리면 되는 일인 줄 알았다. 하지만 원하는 결과물을 얻으려면 결국 사람들과 소통하고 설득해야 했다. 그 능력이 부족하면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도 말짱 도루묵이었다.
나보다 경력이 많거나 전문성이 높은 사람들에게 내가 원하는 방향을 설명하고 함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현장에서는 결과로 증명해야 하고, 신뢰를 얻기 전까지는 냉정한 순간들도 많았다. 어떨 때는 순간의 오판 하나가 현장 전체에 부담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일정이 밀리고, 스태프들의 피로가 배가되거나 불필요한 비용이 발생하기도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연출가는 단순히 그림을 구상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고, 각자의 능력을 하나의 방향으로 모으는 사람에 더 가깝다.
위태로웠던 시기를 지나며 업을 떠나지 않고 계속하다 보니 오랫동안 INFP로 살던 내가 어느새 ISTP로 바뀌어 있었다. 물론 본연의 성격까지 완전히 바뀐 건 아니다. 아직도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마다 낯설고 긴장된다.

손에 꼽히게 버거웠던 현장 중 하나. 극한의 스트레스 속에서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어시스트 친구가 마이크를 머리에 대고 있는 내 모습을 찍어줬다.
자기만족은 외주가 안 된다
어떨 때에는 인력 섭외가 어렵거나, 협업 과정에서 스타일이 맞지 않아 기대했던 방식으로 작업이 진행되지 않는 경우가 생긴다. 그러다 보면 원래 계획에 없던 분야까지 직접 맡게 된다.
사실 나는 여기까지만 신경 쓰고 싶고, 협업인 만큼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온전히 맡기고 싶다. 그런데도 왜 이런 것까지 내가 하고 있지 싶은 순간이 많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자기만족에 가까워지려면 직접 해야 한다.
그렇게 예정에 없던 공부를 하고, 익숙하지 않은 프로그램을 뒤적이고, 부족한 부분을 어떻게든 메워 작업을 끝내고 나면 뒤늦게 ‘아, 이것도 내가 꽤 고생했지’ 하는 묘한 보람과 함께 그 프로젝트에 대한 애착도 더 올라간다.

오메가사피엔〈Serenade for Mrs. Jeon〉 뮤직비디오 제작 당시 미술 인력을 구하지 못해 필요한 소품들을 직접 준비했다. 그중 멤버별로 P2P 사이트 쿠폰 패러디 소품을 편집해서 만들었는데, 정작 결과물에서는 거의 노출이 안 됐다.
비전문가의 참견
점점 후반(CG, 컬러그레이딩) 작업자들과 협업하는 과정에서 내 의견을 내거나 직접 개입하는 일이 많아진다.
초창기에는 작업자마다 각자의 취향과 작업 방식이 있다고 생각해 최대한 존중하려 했다. 하지만 너무 소극적으로 임하면 결과물이 나온 뒤에 ‘조금 더 이야기해 볼 걸’ 하는 미련이 크게 남는 경우도 있었다.
3D 작업까지 직접 품어볼 엄두는 나지 않지만 최근에는 AI 활용 빈도가 높아지면서 원하는 그림을 얻기 위해 튜토리얼을 찾아보며 2D FX나 컴포지팅을 직접 작업해 CG 장면을 마무리 짓는 일이 부쩍 많아졌다.
비전문가로서 전문가의 영역에 침범하는 것 같아 눈치가 보일 때도 있는데 몇몇 작업자들이 "원하는 게 구체적이라 오히려 더 편하다"라는 말을 해줄 때 안도한다.
그래도 비전문 야매 포지션으로 필요한 만큼만 습득하는 게 쌓이다 보니 작업자들과 소통하는 일은 전보다 수월해졌다. 결국 나도 어느정도 할 줄 알아야 협업자들과 같은 언어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전우와 클라이언트 사이
영상 준비 과정에서 가장 기대하고 즐기는 순간 중 하나는 낯선 지역으로 로케이션 헌팅을 떠날 때다.
좋은 그림을 위해 특이하거나 아름다운 장소를 찾아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탐험을 하게 된다. 그 지역 음식을 먹어보기도 하고, 평소라면 가볼 일 없었을 동네도 구경한다.
물론 이건 헌팅이 잘 풀리고 있을 때 이야기다. 수확이 있을 때 누릴 수 있는, 답사와 여행 사이 소소한 보너스 같은 시간이다.

첫 답사 후 일주일 만에 풀이 많이 자라 장소 컨디션이 크게 달라졌다. 설상가상으로 전날 내린 비 때문에 바닥도 축축했다. 답사를 마치고 인사한 뒤 돌아가던 촬영 감독님의 차가 진흙에 빠졌고, 30분가량 온갖 방법을 동원해 봤지만 결국 견인차 엔딩이었다.
기술 협업자들은 결국 같은 결과물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이라는 믿음이 있다. 디테일한 가이드를 공유하며 내 머릿속의 그림을 함께 동기화해 나가는 전우 같은 느낌이다. 반면 클라이언트와의 협업은 상대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과정과 결과물의 체감이 크게 달라진다.
예전에는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물이 나오면 클라이언트 탓을 하기도 했지만 프로젝트를 거듭할수록 내가 명확하게 설명하고 설득하지 못한 문제라는 걸 느꼈다.
내 기준과 클라이언트의 기준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많아진다. 필요한 순간에는 타협할 줄 알고, 필요한 순간에 잘 밀어붙이며, 누가 이기느냐가 아니라 서로의 니즈가 만나는 교집합을 얼마나 넓힐 수 있느냐를 아는 것이 그 감각과 경험치를 쌓는 것이 중요한 능력 중 하나라고 느낀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와 편집본에 대한 피드백을 정리한 메모.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느끼는 그와 나의 답답함이 곳곳에 묻어 있다.
작업 공부 vs 사람 공부
결국 작업 공부보다 사람 공부가 더 오래 걸리고 어렵다.
기술은 튜토리얼을 보고 따라 하면 어느 정도 축적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누군가와 호흡을 맞췄다고 해서 다음 사람과도 같은 방식이 통하는 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압박해야 움직이고, 어떤 사람은 기다려야 움직이고, 어떤 사람은 이유를 완전히 설명해야만 움직이고, 어떤 사람은 그냥 믿어줘야 움직인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작업 자체보다도 어떤 사람들과 함께 일할 것인지, 어떤 환경에서 일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점점 많아진다. 좋은 결과물은 결국 사람을 통과해 나온다는 사실을 점점 실감하게 된다.

홍콩 본 촬영 전날. 최종 답사를 마치고 스태프들과 샷 리스트를 복기하며 다음 날 진행에 대해 분담을 논의하며 공부 중이다. 현지 스태프들의 의욕적이고 유쾌한 에너지가 인상적이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해온 작업의 분야는 달랐지만, 원하는 걸 얻기 위해 필요한 기술을 그때그때 야매로 익혔고, 결국 손으로든 컴퓨터로든 직접 메우며 만들어온 공통점이 있었다. 그 과정이 신물이 날 때도 있지만, 덕분에 여기까지 나를 끌고 왔다.
지금도 이 일이 내 천직인지는 잘 모르겠다. 십수 년 뒤의 나는 지금 전혀 예상하지 못한 또 다른 종류의 작업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약간의 두려움과 복잡한 기대감을 품은 채, 일단은 지금의 일을 정성 들여 이어가겠다.
Jan’ Qui @maquijanqui
안녕하세요 잔퀴(Jan’ Qui)라는 활동명으로 비디오 연출을 하며 익숙해지는 대신 버티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한 편을 꼽기가 어려워서, 지금의 저를 여기까지 데려다준 작업들을 늘어놓아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