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뇌> 시리즈는 전통 불화 모사수복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군도 형식의 탱화를 그렸던 경험으로부터 출발한다. 전통 불교미술에서는 부처와 보살, 사천왕 등의 여러 인물상을 일정한 형식으로 표현한다. 부처의 신체적 특성을 32가지로 정형화하여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다른 유형의 인물도 다양한 그림에서 대부분 유사한 형태로 나타난다. 또한 등장인물의 수와 형태, 위치 배열, 색채 등이 거의 동일하다.

기본적으로 전통의 문화적 · 역사적 의미를 중요하게 인지하고 있지만, 규율과 법칙이 중시되는 종교화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인물 도상 표현과 배열 형식은 나에게 고착화된 고정관념으로 느껴진다. 불교철학에서는 기본적으로 이 세계의 모든 현상이 의미와 가치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고 전제한다. 이러한 불교의 형이상학적 담론을 현대적 맥락에서 재해석하여 관념에 대한 고정된 인식의 한계를 작품을 통해 조망하고자 한다.

<번뇌> 작업에서 다양성과 변화 가능성으로 대표되는 불교적 가치관을 동시대 미술의 언어로 전달하기 위해 비정형적인 조형방식을 사용하였고, 전통 불교미술의 채색 방식과는 다르게 석채를 흘려 표현하였다. 비정형적 형상에 석채가 타고 흘러 굳어진 오브제는 어떠한 기호도 결코 그 스스로 단일한 상태로 존재할 수 없음을 표상한다. 어떤 것도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모든 것은 다른 것과 상호작용하며 그것의 의미와 존재를 결정한다. 결국 작업은 명확하게 단정되거나 고정되어 불변하는 것이 아니면서 끊임없이 전환하는 변화의 형태를 통해 번뇌의 근원을 고찰하는 과정이다. <번뇌> 작업은 108개의 시리즈로 진행하는 작업과정으로 불교의 수행성을 예술실천에 포함하여 표현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