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수 — 홍상수 영화, 이제는 좀 피로합니다
네 편의 영화를 찍은 후 숨 고르기 감독이 된 성준. 술집에서 시나리오를 쓰던 중 우연히 세 명의 영화과 남학생과 합석해 낮술을 마신다. 헤어질 즈음 성준은 급발진한다. “왜 이렇게 날 따라다니면서 따라 하고 난리야!” 소리를 지르더니 떠난다. 웃기게 아무도 성준을 따라 한 적 없다.

홍상수 감독의 〈북촌 방향〉 초반부에 등장하는 씬이다. 없어도 충분한데 굳이 들어가 있다는 인상을 준다. 단지 웃겨서 넣었을까? 아니라면 후배 영화 감독에게 하는 일침으로 봐야 할까? 홍상수 본인만 알 것이다. 오랜만에 이 장면을 돌려보면서 혼자 웃었다. 자신의 영화가 인터넷 밈이 된 세상에 홍상수 감독은 어떤 반응을 꺼낼까. 어쩌면 그는 그때부터 본인의 미친 스타성을 알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홍상수는 빠와 까를 모두 미치게 하는 슈퍼스타다.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부터 논쟁적 감독으로 불렸다. 올해로 데뷔 30주년인 그는 아직도 지치지 않고 매년 한두 편씩 영화를 찍는다. 찍는 족족 온갖 영화제에 초청받고 올해의 영화로 선정된다. 어느덧 논쟁적 감독이라는 꼬리표는 사라지고 평론가의 전폭적 지지를 받는 감독이 되었다.
감독으로의 행보는 분명 존경스럽다. 그는 독자적 제작 시스템을 마련해 외부 간섭이 없이 매번 새로운 영화적 실험을 하는 도전적 태도를 내보인다. 대충 찍은 듯하지만 복잡한 논리의 문어체 대사, 시공간과 구조를 퍼즐처럼 갖고 노는 형식 실험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21세기 영화의 최전선이라 불릴 만하다. 그래서일까. 영화평론가에게 홍상수 영화 평론을 쓰는 일은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는 하나의 지적 도전이다.

안타깝게도 대중의 기억 속 홍상수는 논란의 대상이며 그의 영화는 예술가 중년 남성의 찌질함을 그리는 초현실적 코미디다. 아니 괴담에 가깝다. 술자리에서 홍상수 영화 속 남성 같은 남성을 만났다는 경험담이 하나둘 쌓이면서 사실성이 생겨서다. 홍상수 영화는〈찌질의 역사〉, 〈나는 솔로〉 등에 영향을 주기도 했으며 그의 영화 속 남성의 말투를 이상하게 따라 한 코미디와 ‘상수룩’ 등 2차 창작과 인터넷 밈을 양산했다. 한마디로 작가주의 홍상수와 사실주의 홍상수의 이미지가 나뉘어 있는 셈이다. 박찬욱과 봉준호도 한 수 접고 갈 도화살은 그 차이에서 생긴다.

나는 언제부턴가 홍상수 영화가 피로해졌다. 영알못이라 손가락질한다면 달게 받도록 하겠다.
홍상수 영화에 푹 빠져 지낸 시절이 있다. 2016년쯤이었다. 불륜 논란이 터진 후부터 그의 영화는 길티 플레저가 되었다. 호기심에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을 극장에서 본 후부터 그의 영화에 매혹되어서 필모를 끝까지 파고 가고, 파고 가면서 정주행했다.

왜 그토록 깊게 빠졌을까. 그의 예술적 실험에 반하기도 했지만, 그의 영화가 덕질할 수 있는 덕질 요소, 즉 데이터베이스 집합소이기 때문이 아닐까.〈라디오스타〉 속 유준상의 말대로 홍상수 영화는 아침마다 쓴 쪽대본으로 즉흥적으로 촬영된다. 날씨의 영향 등 날마다 조건에 따라 상황이 달라진다. 대신 배우와 캐릭터 설정은 하나의 소품처럼 재활용된다. 어쩐지 글에서 알코올 냄새가 나는 모호해서 정확한 시놉시스, 나날이 수제품 감성이 풍기는 포스터까지. 복제인 듯하면서도 복제가 아닌, 그 반복과 그 안의 즉흥성이 홍상수스러움을 만든다.

홍상수인 듯 홍상수가 아닌 페르소나를 발견해 그의 심리를 가늠하는 묘한 재미를 느끼곤 했다. 남성 캐릭터가 급발진해서 찌질하게 굴면 여성 캐릭터는 거기에 속박되지 않고 되레 남성을 희롱하고 뻘쭘하게 만든다. 이는 영화적인 실험과 맞물려 여성을 지리멸렬한 남성의 세계를 유영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이때 홍상수 자신이 밈이 되는 듯한 자조적 유머 감각이 생긴다. 대중은 이 유머 감각을 소비한다. 홍상수는 어느덧 시네필의 서브컬처가 아니라 상수룩, 홍상수 남성을 모방하는 코미디, 홍상수 키링 굿즈로 인터넷 밈이 되었다.

그의 영화가 밈으로 소비되고 찬사가 이어질수록 언짢음도 커졌다. 찌질하고 자기연민에 사로잡힌 남성을 영화에 박제한 후 그 자신이 지리멸렬한 세계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냉소적 관찰자의 시선을 품고 있어서다. 나아가 남성은 태생적으로 찌질하다며 방관하는 듯하다. 탈덕의 시작은 〈강변호텔〉이었다. 홍상수 본인의 자캐로 추정되는 시인 영환은 여성을 숭배하고 지리멸렬한 세상에 머물지 않으려 하다가 죽는다. 예술 아니면 세속. 자신을 전자에 두고 이를 미학으로 승화하는 유미주의적인 시선에 거리감이 생겼다. 어떤 관객에게는 이 미학이 자기연민의 알리바이가 될 수도 있다. 이처럼 홍상수 영화에서 풍자가 사라지고 세상을 초월하는 나라는 자의식이 아름답게 드러날 때마다 작품성과 별개로 재미가 반감되었다.
늙어서일까. 본인의 영화 속 중년 남성이 인터넷 밈의 소재가 된다는 사실을 안 것일까.〈도망친 여자〉부터 홍상수 영화 속 중년 남성은 말이 부쩍 줄었고 말을 길게 할 때마다 편집 당하기 시작했다. 이후 〈소설가의 영화〉의 엔딩을 보고 그의 최고 걸작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영화가 될 만한 소재는 연인뿐이며, 연인은 영화가 아닌 브이로그로 찍을 때 가장 영화답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솔직함에 반했다. 흑백으로 촬영되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의 영화에서 생기가 샘솟았다. 영화로 세상을 냉소하기보다는 눈 앞의 연인을 사랑하는 태도가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다음 수유천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배경 삼아서 영화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수유천〉을 보고 지적인 흥미를 잃었다. 태피스트리처럼 잘 짜인 작품의 구조적 실험은 분명 아름답다. 다만 영화적 형식을 빌린 회피형 결말이 실망스러웠다.
홍상수 영화는 팔수록 미궁이다. 평론을 아무리 써도 뒤죽박죽이라 이해하기 어렵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이렇게까지 피로감을 토로할 수밖에 없을까. 실존주의에 빠져서일까.〈생활의 발견〉에서 “우리 사람은 못 돼도 괴물은 되지 말자”라는 대사를 경수에게 말해서일지도 모르겠다. 나한테 홍상수 영화는 내용과 형식 둘 다에서 예술가가, 아니 찌질할 수밖에 없는 한 인간이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를 다룬다는 점에서 내 인생의 화두다. 나는 이 감독에 평생 얽매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대충 알고 좋아하고, 다 알고 싫어하자”라는 김민경 편집자의 명언이 SNS를 뒤흔들었다. 호불호가 아니라 홍상수를 둘러싼 숭배와 혐오가 팽팽히 대립하는 상황에 던지는 적절한 일침이었다. 숭배하기에도, 혐오하기에도 홍상수는 곤란한 이야깃거리다. 어떤 작품은 아름답고, 어떤 작품은 와닿지 않는다. 평론가 입장에서는 매 작품 쏟아지는 찬사 사이에서 종종 소외감을 느끼기도 한다. 작품의 완성도와 별개로 생기는 이 언짢음이 시네필답지 않은 감정일까봐. 이쯤이면 오랫동안 둘 사이를 갈팡질팡하다 탈진한 영화평론가도 있다는 생존 신고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김경수 @vivre_wasavie
영화평론가. 인터넷 밈과 대중문화, 책에 관해 쓰는 일도 한다. <씨네21> 객원기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코아르>에 영화 비평을, <릿터>에 서평을 연재하는 중이다. 단행본으로는 석사 논문을 고친 <한국 인터넷 밈의 계보학>이 있다. 만성적인 도파민 중독으로 인해 영화를 볼 때 가끔 졸음이 밀려든다. 지금은 두 권의 단행본을 쓰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