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철 — 복리의 마법

신동철 — 복리의 마법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은 결코 그 순간이 아니다. 죽음, 사랑, 아름다움, 이 모든 것들이 은총과 우연에 의해 불시에 나타날 때, 그것은 결코 그 순간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그 순간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단지 시간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아주 일찍 시작됐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환희의 인간』, 크리스티앙 보뱅



어떤 일들은 갑작스럽게 시작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오래전부터 축적된 시간의 결과물이다. 나의 창작 역시 재료에 대한 호기심에서 이미 시작되었고, 그 시간들이 쌓이며 지금의 작업으로 이어졌다. 


호기심에서 창작의 주체로 

가끔 초등학교 미술 시간의 다양한 재료들(지점토, 색종이, 4B 연필, 고무 판화, 포스터칼라와 크레파스)의 냄새가 생각난다. 미술 시간이 재미있었던 이유는 그림 그리기 자체보다도 재료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대학에서도 서양화, 조소, 판화 수업 등을 들으며 기법이나 물성에 존재하는 다양한 가능성을 느끼며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 같다.


첫 직장을 가지고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작은 소품이나 아트북, 여행 등의 소비를 통해 나의 취향을 찾아갔다. 이후 책을 만들어 아트북페어에 참여하면서, 어설프지만 창작의 주체가 되는 즐거움을 느꼈다. 그 이후 나는 지금까지 10년간 베를린, 싱가포르, 도쿄, 베이징, 타이베이 등 다양한 도시에서 열리는 27개의 아트북페어에 참여하며, 다양한 관객을 만나러 다니고, 책들을 수집하며 영감을 얻었다. 겉보기에 비슷한 형태의 책들이지만, 이 사소한 차이들은 속눈썹 펌이나 네일 아트처럼 직관적으로 인지된다. 모든 작품들은 관객의 손에 들어 올려진 순간, 무게와 질감, 이미지가 어우러진 하나의 오브제가 된다. 이때 관객은 작가나 퍼블리셔와의 대화를 통해 책과 더 깊이 교감하게 된다.

아날로그로 회귀하는 것과 AI 이미지 

재료를 탐구하는 즐거움은 결국 세상의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판이 찍히며 생기는 우연성, 타투 머신이 만들어내는 규칙성과 불규칙성, 종이 가면이 완성되며 생기는 큰 입체감 등, 작업 과정에서 질감과 교감하는 순간들을 만난다. 

AI로 만들어지는 이미지도 인위적인 표면 위에 필터를 추가해 현실처럼 위장하곤 한다. 이러한 AI 이미지로 시각적으로 괴로울 때도 있지만, 장점을 생각해보자면 이미지를 다루는 방식에 익숙치 않던 사람들도 직접 생성해볼 수 있다는 것. 이전보다 더 많은 이들이 언어가 아닌 이미지로 상상하는 방식에 익숙해졌다고 느낀다. 시각 예술가들에게는 당연했던 사고방식이 비창작자에게까지 확장된 결과다. 마치 서로 같은 언어를 쓰게 된 것처럼 이전에는 해석이 난해했던 이미지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

콜렉티브 활동: 낫 어 넘버(Not a Number) 

나는 관객들에게 내가 예술을 하며 느끼는 즐거움을 전달하고 싶다. 대부분의 예술은 즐거움에서 시작되지만, 그 과정이나 결과는 반대되는 느낌을 줄 때가 많다. 

낫 어 넘버(Not a Number)는 아트북페어에서 만난 동료들과 작년부터 함께 만들어가고 있는 콜렉티브로, 멤버 각자의 가능성과 실험정신, 리더십을 펼칠 수 있는 무대이다. 우리 팀은 해외 아트북페어에 참여하기 위해서 만들어졌지만, 진(Zine) 메이킹 워크샵과 진 페어, 가면 퍼레이드를 열고, 올해 초 타이베이에 있는 VENUE라는 예술 공간에서 전시를 했다. 완결성은 결국 뒤따라올 것이라는 믿음 아래, 실험정신과 실행을 우선시했기 때문에 만들어낸 결과 같다.

교육과 실천

2년 전 처음 강의를 시작하며 학생들을 만났을 때, 과거의 나를 마주한 느낌을 받았다. 매 수업 시간, 그 시절 나에게 건네고 싶었던 조언들을 생각하며 결과물의 완성도보다 재료를 탐구하고 반복하며 기록하는 과정 자체에 집중할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한다. 그래서 결과 중심의 전형적인 디자인 교육보다는 가면 만들기, 종이 만들기, 다른 방식으로 관찰하기, 판화와 같은 커리큘럼을 만든다. 그때의 내가 느꼈던 창작의 즐거움을 지금의 학생들도 경험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또한 가끔은 학생들과 함께 전시를 구성하고, 아트북페어에 함께 부스로 참여하며 그들이 천천히 작업을 축적해 나가도록 돕고 있다.

직장이었던 보험회사에서는복리의 마법 자주 이야기했다. 작은 단위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며 누적되면 결과값을 가진다는 개념이다. 애석하게도 중요한 원리를 재테크에는 적용하지 못했지만, 작업에서는 분명하게 작동했다. 불신과 불안, 비효율로 느끼던 시간들조차 작업의 일부로 축적되었고, 노트 구석에 흩어져 있던 생각들은 점차 구체화되었다. 과정에서 생긴 자신감과 애착이 작업을 하고 있다고 느끼게 한다.

신동철 @robineggpie

2015년부터 Robineggpie라는 필명으로 일러스트와 아트북 작업을 한다. 커미션으로는 에스파, 라이즈, 무신사 등과 작업했으며, 홍익대학교에서 일러스트레이션 수업을 진행한다. 현재는 낫 어 넘버(Not a Number)라는 콜렉티브와 함께 가면 퍼레이드, 워크숍, 진(Zine) 페어, 설치 작업 등으로 작업의 매체를 확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