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 다자이 오사무, 러닝 합격

이창훈 — 다자이 오사무, 러닝 합격

과거 한국을 강타했던 MBTI 열풍을 떠올리면 가끔은 그 시절이 그립다. 네 글자의 분류만으로도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라는 질문에 빠른 답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

누군가를 만나는 일 자체가 조심스럽고 피곤했지만, MBTI라는 틀 덕분에 ‘괜찮은 사람이 어딘가에는 있을 거야’라는 작은 희망을 조금 더 간절히 붙잡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누군가를 만나기도 전부터 이런 생각이 든다. “그놈이 그놈이지.”

 

본인은 <나는 솔로> 18기 옥순을 보며 MBTI에 정이 떨어졌다.

 

희망보다 체념이 먼저 피니시 라인을 통과한다. 붙잡을 만한 것들이 결국 다 스쳐 지나간다는 걸 아는 태도, 꽤 넓게 퍼져버린 무상관(無常觀)이다.

다자이 오사무는 이런 말을 남겼다. “이제 내겐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그저 모든 것은 스쳐 지나갑니다. 내가 지금까지 그렇게 몸부림치며 살아왔던, 이른바 ‘인간’ 세상에서 단 하나 진리라고 생각한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스쳐 지나간다.”

기대하지 않으니 실망도 줄고, 믿지 않으니 상처도 덜하다. 하지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상태가 편안하기만 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체념에 빠져 그대로 누워 있기보다는 밖으로 나가 달리는 쪽을 선택했다.

추위에 떨면서 밖으로 나가 달리는 시간에는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말을 머리로 이해하는 대신 몸으로 체험하게 된다. 공기는 차갑고, 숨은 가쁘고, 다리는 무거워지고, 시야는 흐려진다. 하지만 결국 그 순간마저 지나간다.

체념이 먼저 피니시 라인을 통과하기 전에, 한 번쯤은 밖으로 나가 달려봐도 좋겠다.

 

2024 파리 올림픽에서 시판 하산이 피니시 라인을 끊는 장면. 42.195km 마라톤에서 1 ,2위 기록은 단 3초 차이였다.

 

지난 글에서는 러닝 입문자들을 모아 한강을 달린 분투의 이야기를 썼다. 대부분은 숨이 가빴고 누군가는 중간에 걸었고 누군가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뛰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유독 편안해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별명은 “다자이 오사무.”

살다 보면 제2의 다자이 오사무들을 만나기도 한다. 그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꽤 공통된 특징이 있다.

- 호남형 외모. 다리가 얇고 길다.
- 식사를 삶의 중심에 두지 않는다.
- 염세적이고 예민하다.
- 권위에 쉽게 굴복하지 않는다.
- 망원, 성수, 이태원 근처에 산다.

이 목록만 보면 불굴의 에겐남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마의 사상체질로 보면 이들은 대체로 소양인(少陽人)에 가깝다. 에너지가 위로 잘 떠 있고 몸이 가벼운 데다 한 자리에 오래 머무는 걸 힘들어하는 타입. 다자이 오사무가 러닝을 잘했던 이유, 그리고 앞으로 더 성장할 수 있는 이유는 의지나 근성이 아니라 구조에 더 가깝다. 그 구조를 조금만 뜯어보면 다음 네 가지로 정리된다.

 

(1) 키빼몸

 

그중 가장 직관적인 지표가 ‘키빼몸’이다. 키(cm)에서 몸무게(kg)를 뺀 숫자. 방송용 카메라 앞에 서는 사람들에게는 꽤 익숙한 단어일 수 있다. 쉽게 말하면 연비다. 무거운 SUV보다 가벼운 경차가 더 멀리, 더 쉽게 가는 것과 같다.

일반적으로 키빼몸 100만 돼도 충분히 달리기 좋은 몸이라고 본다.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마라토너 엘리우드 킵초게의 키빼몸은 115 정도 되며 그는 인류 최초로 마라톤 42.195km를 2시간 안으로 주파한 사람이다.

다자이 오사무 류의 사람들도 비슷하다. 크게 먹지 않고 많이 쌓아두지 않으니 달릴 때 몸은 가볍다. 어쩌면 그들은 이미 러닝에 맞는 상태로 하루를 버티고 있는지도 모른다.

 


러너스 바디의 정석 ‘언플러그드보이’의 강현겸 같은 몸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인지 모델들이 러닝을 많이 한다.

 

(2) 고정비

 

다자이 오사무들이 헬스장에 잘 안 가는 이유가 있다. 뭔가에 묶여 있는 듯한 ‘고정비’를 본능적으로 싫어한다. 헬스장 월 7~10만 원, 수영 8만 원 안팎, 요가나 필라테스는 15만 원 이상. “이번 달도 또 돈 나가네”라는 생각이, 운동은 해보기도 전에 먼저 든다.

러닝은 다르다. 언제 어디서든 문을 열고 나가면 시작이다. 예약도 없고 회비도 없고 누군가에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러닝에 드는 비용은 전부 ‘변동비’다. 통제권이 자기 손에 있다. 생활이 일정하지 않은 사람들, 불규칙한 패턴으로 하루를 버텨내는 작업자들에게 고정비가 없다는 것은 결정적인 메리트다.

 

(3) 부동산

 

다자이 오사무들은 망원, 성수, 이태원처럼 대체로 비슷한 동네에 산다. 임대료와 감성의 균형, 일과 생활의 경계가 아직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곳들. 이 동네들의 공통점은 시티런부터 한강까지 접근성이 좋다는 것이다.

망원에서는 양화대교를 지나 선유도공원을 한 바퀴 돈다. 아름다운 야경 속에서 시끄럽던 생각이 꺼진다. 성수에서는 서울숲과 도심을 가로지르며 달린다. 몸의 리듬이 서서히 바뀌는 걸 느낀다. 이태원에서는 잠수교, 혹은 남산 언덕을 오른다. 숨이 차오를수록 감정은 단순해진다.

 

한강은 어디서나 충분히 아름답지만, 양화한강공원에서 선유도로 이어지는 길을 달릴 때만큼은 현실에서 잠시 빠져나온 듯한 기분이 든다. 마치 젤다의 전설 속 하이랄 평원처럼.

 

(4) 맞춤 운동법

 

다자이 오사무 류의 초보자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한다. 처음부터 열심히 뛰지 않아도 된다고. 오디오북이나 팟캐스트를 들으며 천천히 뛰어도 충분하다고. 다만, 어려운 내용 말고 술술 넘어가는 게 좋다. 숨은 조금 차지만 내용을 머리에 잡아둘 수 있는 속도. 그게 지금은 가장 좋다.

머리가 너무 복잡한 날엔 아무 것도 듣지 말자. 숨과 발소리만 남기면서 러닝.


추천 오디오북

 

최강록 에세이 〈요리를 한다는 것〉

— 운동만큼이나 중요한 ‘먹는 일’에 대한 태도를 진지하지만 무겁지 않게 다룬다. 러닝 속도에 잘 맞게 들을 수 있다.

 


〈흑백 요리사2〉 인터뷰에서 많은 감동을 주었다. 그는 요리도 잘하고 말도 잘하고 글도 잘 쓴다.

 

추천 유튜브

 

안은태 @Ahnsta_

— 달리다 보면 더 빨라지고 싶어지는 순간이 온다. 그때 그의 담담한 말투로 듣는 훈련 이야기는 마음을 가라앉힌다.

 

 

추천 팟캐스트

 

러닝 클럽 팟캐스트 - 굿러너컴퍼니 대표 이윤주 편

— 우울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달리기를 시작한 사람이 국내 최대 규모의 러닝 브랜드를 만들기까지의 이야기. 달리며 듣기에 더없이 좋다.

 

 

러닝은 삶을 몸으로 쓰는 일기에 가깝다. 모두가 다자이 오사무처럼 될 필요는 없다.

어떤 날은 사강처럼 가볍게, 어떤 날은 버지니아 울프처럼 다양한 리듬으로, 어떤 날은 다자이 오사무처럼 빠르게, 또 어떤 날은 헤밍웨이처럼 강하게, 카프카처럼 숨 가쁘게, 박완서처럼 담담하게 달려도 된다.

중요한 건 누구처럼 달리느냐가 아니라, 자기만의 문장과 자기만의 속도로 달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창훈 @085darling

출퇴근 시간을 압도적으로 줄이고 밥 해 먹는 삶, 운동하라고 잔소리하는 삶, 꽃을 가꾸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 웰니스 스튜디오 <무브오브투데이>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