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희준 ─ 넓은 집에 살기 싫다고 말하게 된 경위
나는 일찍이 음악을 하고자 어린 시절을 고시원 같은 작업실에서 보냈다. 문을 열면 좁은 복도가 있었고, 끝에는 공용 샤워실이 있었다. 벽은 얇아 이웃의 알람 소리, 기타 소리, 심지어 한숨마저 내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누군가는 그곳을 불안정한 집이라 말하겠지만, 어린 나는 거기서 묘한 안전을 느꼈다. 당시의 사회에서 느끼던 소외와 폭력이 그곳에서는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시절은 내게, 집의 크기보다 삶의 밀도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한국 사회에서 집은 단순한 주거 공간을 넘어선다. 집의 위치와 크기는 곧 성공과 계급을 증명하는 휘장이 되고, 사람들은 더 넓은 집을 향해 끊임없이 달린다. 부르디외가 ‘구별짓기’에서 말했듯, 취향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사회적 구별짓기의 무기다. 집을 소유한다는 것은 곧 타인과 자신을 구분 짓는 기호가 된다. 우리는 그 기호를 통해 안전을 보장받는 듯 믿지만, 사실은 그 안전마저 담보로 삼아야만 유지되는 불안정한 구조 속에 살아간다.
담보 같았던 지난날을 돌아본다. 10만 원만 더 내면 나는 좀 더 안전한 번호키가 달린 방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 내 방문 앞까지 오는 이를 저지할 사람을 고용할 수도 있었다. 10만 원과 안전 사이에서 고민하던 나는, 종종 안전을 선택하지 않고 내 몸과 삶을 내버려두었다. 그렇게 안전하지 않은 삶에 익숙해졌다.
이는 단순히 가난의 이야기가 아니다. 안전을 선택하여 폐쇄적인 주거 환경 속으로 들어간 이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집값 하락·치안 위협·환경 악화에 더 예민하다. 신경증적인 환경에서 계급은 가시화되고, 갈등은 첨예화된다. 한국에서 안전은 삶을 지켜주는 기본권이 아니라, 돈을 통해 사고 팔리는 부동산 자본으로 전환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넓은 집에 살기 싫다고 말한다. 그것은 가난의 고백이 아니라, 구별짓기의 논리에 대한 반대다. 구별짓기를 끝내자는 촉구다. 내가 원하는 집은 크기가 아니라, 숨 쉴 수 있는 관계의 밀도와 예술과 사람들이 오가는 자리다. 나에게 집은 더 이상 사회적 지위를 증명하는 장치가 아니라, 서로의 삶을 지켜주는 가장 작은 단위다.
우희준 huijun woo @woohuijun
서울에서 노래하고 (베이스)기타를 치며 돈을 번다. 생각이 참 많으며 활자중독에 시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