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선 — 내가 사랑한 할머니 작가들

안동선 — 내가 사랑한 할머니 작가들

현대미술에 관한 글을 쓰고 토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 것은, 내가 열렬히 좋아하는 미술가들이 대체로 여성이라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할머니라고 할 수 있는 나이 든 아티스트들이었는데, 이들의 삶을 돌아보며 발견한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무엇보다 오래 살아야 한다는 점이다. 농담이 아니라 비장한 진리다. 여성 예술가의 작품 세계에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지고 인정받기까지는 상대적으로 더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장수는 거장이 되는 제1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전형적인 결혼 관계에 자신을 속박하지 않고, 주체적인 관계를 형성하여 새로운 가족 형태를 이루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디자인하며, 다양한 관계 속에서 살아갔다. 

셋째, 자연과학 및 영적 세계처럼 대척점에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아우르는 통합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자신만의 진리를 추구하는 데 있어 어떤 지식 체계에도 편견이 없었다. 

나는 예술이라는 심오한 책임을 부여받지는 않았으나, 같은 여성으로서 그들의 삶에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힌트와 영감, 힘을 얻는다. 여러 미술관과 기관들이 2026년 주요 전시 일정을 발표했고, 전시장에서 만날 할머니 작가들의 작품 세계를 상상하면 벌써부터 설렌다. 

2026.01.21-2026.03.07 에텔 아드난과 이성자 2인전 <To meet the sun>

Etel Adnan Portrait _ Photo © White Cube (Patrick Dandy)

이성자_1980s Atelier “Rivière Argent” in Tourrettes-sur-Loup_1

 

화이트 큐브 갤러리에서는 2026년 첫 전시로 에텔 아드난과 이성자의 2인전을 개최한다. 1925년과 1918년에 태어난 두 작가는 몇 년 전 세상을 떠났다. 

샌프란시스코 모마에서 에텔 아드난의 아담한 그림들을 직접 보았을 때,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레바논에서 태어나 미술가, 시인, 레즈비언으로 살아오면서 수많은 투쟁과 심연을 겪었지만, 에텔 아드난은 그것을 새털처럼 가벼운 자유와 아름다움으로 표현하고 있구나.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이성자의 작품 세계는 작가의 삶에 대해 알면 알수록 더 감탄스러웠다. 30대에 이혼하고 세 아들과 생이별한 후 프랑스로 떠나, 외로움과 절망 속에서 서양화 기법을 통해 정립한 동양의 세계론은 얼마나 우주적이었는지!  

2026.03.17-2026.06.28 김윤신 회고전(가제) 

 



김윤신, 2024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전경
김윤신, 프로필사진

 

호암미술관에서는 한국 여성 조각 1세대를 대표하는 김윤신의 70여 년에 걸친 예술세계를 조명하는 첫 대규모 회고전을 개최한다. 1935년생으로 올해 91세인 작가는 20세기와 21세기를 넘나드는 예술 여정을 한국, 프랑스, 아르헨티나를 거쳐 다시 한국으로 이어가고 있다. 

2년 전 제60회 베니스 비엔날레 본전시에 참여한 김윤신 작가는 자신의 작품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같이 이 나라 저 나라 찾아다니는 사람에게는 어디든 작업하는 곳이 자기 나라가 됩니다. 불편은 몰라요.” 베니스의 돌길을 걸으며 그녀를 만날 때마다, 모두가 경외의 눈길로 인사를 건넸던 그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오는 봄, 호암미술관에서 또 한 번 환희의 소란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있다. 

2025.12.23-2026.04.05 최재은 개인전 <최재은: 약속<Where Beings Be)>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2025, 옻칠 나무 패널에 압화, 각 41.3×26.8×3.1cm ©이치카와 야스시

최재은 ©서울시립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1970년대 중반 일본으로 건너가 생명과 자연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탐구해 온 최재은 작가의 국내 첫 국공립 미술관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인류의 기원에서부터 생태 위기까지의 시간 축을 연결하며, 자연 파괴에 대한 인간의 책임과 공생 가능성을 환기하는 그의 작업은 모든 생명에 대한 존중을 다시 다짐하게 만든다. 560여 점의 둘풀과 둘꽃을 채집하여 압화하고 이름을 붙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2025)’ 를 보며 각 생명에게 존재에 대한 주권을 찾아주고자 하는 작가의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2026.5.05-2026.11.29 <환경, 예술이 되다-여성 작가들의 공감각적 실험 1956-1976>(가제) 

Judy Chicago <Feather Room>
Judy Chicago

 

리움에서는 2023년 독일 뮌헨 하우스 데어 쿤스트에서 최초 기획되었던 전시 <Inside Other Spaces. Environments by Women Artists 1956-1976>을 선보인다. 이 그룹전은 전 세계 1세대 여성 설치미술가들의 선구적 작업을 조명하며, 빛, 소리, 일상적 소재 등을 활용한 이들의 실험적 시도와 실천을 재발견한다. 당시 미술사와 비평적 담론에서 누락되었던 작업들을 다시 선보이는 자리로, 특히 주디 시카고와 마르타 미누힌 같은 센 언니들의 혁신적인 작업을 서울에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설렌다. 

2026.9월 예정 김 크리스틴 선 개인전 

 

김 크리스틴 선, Mind Touch Touch Touch Touch Touch, 2025, 종이에 목탄, 100 × 200.5 cm © 갤러리 현대

 

갤러리 현대에서는 프리즈 위크가 있는 9월에 김 크리스틴 선 개인전을 개최한다. 지난해 가을 갤러리가 ‘김 크리스틴 선 작가와 함께한다’고 발표한 이후, 많은 기대를 모아온 전시다. 

한국계 미국인 작가인 김 크리스틴 선은 소리가 사회적 소통의 도구로 작용하는 방식과 소통 속에서 형성되는 번역, 권위, 인식의 체계를 탐구한다. 구어와 수어를 넘나들며 청인 중심의 구조에서 살아온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드로잉, 퍼포먼스, 영상, 설치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소리와 언어에 대한 기존 인식에 질문을 던진다. 특히, 청인 중심의 문화 속에서 마주했던 행동 양식에 대한 도전을, 초록색 체육복을 맞춰 입은 퍼포머들과 함께 일상 소음을 내는 형식으로 조명한 프리즈 런던에서의 만남 이후, 정확히 10년 만에 그녀의 작품을 서울에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기쁘다. 개인전에서 선보일 신작 중 퍼포먼스 작품도 있기를 고대하고 있다. 

참, 김 크리스틴 선 작가는 할머니가 아니다. 미술계는 변화하고 있다.

 

안동선 @andongza

패션지 피처 에디터 출신으로 현재 미술 전문 기자이자 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다. 
먼 과거의 창작자들과 상상의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최고의 럭셔리라고 생각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기록하는 것이 이번 생에서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