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락티(박지민) — AI는 내가 먹은 고구마 색을 모르지
나는 AI가 생성한 글은 늘 ‘구리다’고 말해왔다. 문법이 엉망이거나 환각 현상Hallucination을 보이는 일부 경우를 제외하면 정보가 틀린 것도 아니어서 확실하게 ‘못 썼다’고 말하기엔 애매하다. 그럼에도 어딘가 썩 맘에 들지 않아 ‘구리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챗GPT에 잭슨 폴록의 작품을 설명해달라고 묻고, 그 답이 왜 구리게 느껴지는지 생각해 보았다.
AI 글쓰기의 가장 큰 문제점은 글을 납작하게 쓰는 것이다. 가만 보면 이들은 하나 마나 한 말을 참 많이 한다. 예를 들어 챗GPT에 잭슨 폴록 작품이 기존 미술과 다른 점을 500자로 설명해 보라 하면, ‘단순한 시각적 재현을 넘어, 작가의 행위와 내면이 결합된 사건으로서 미술의 의미를 새롭게 확장했다’라는 식의 답을 내놓는다. 이는 틀린 말은 아니지만, 폴록에게만 해당하는 말도 아니다.
‘단순한 재현이 아니다’라는 표현이 얼마나 영양가 없는 말이냐면, 사진 매체의 등장 이후로는 충실한 재현만을 목적으로 작품을 제작하는 예술가는 거의 없었다. (있는 그대로 세상을 기록하는 게 목적이라면 그들이 속기사나 기록원이 되었겠지 왜 예술가가 되었겠는가?) 이처럼 ‘A가 아니라 B다’라는 이분법적 구조와 ‘의미를 확장했다’라는 식의 단정적인 결론으로 점철된 AI의 문체는 생각의 틈을 허용하지 않는 기계적 사고의 한계를 보여준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이 공허한 문장들이 사실 우리 미술계가 오랫동안 관성적으로 사용해 온 언어를 학습한 결과라는 것이다. 어찌 보면 AI는 그저 우리가 써온 ‘구린’ 방식을 거울처럼 비추고 있을 뿐이다.
각종 생성형 AI가 본격적으로 보급된 2023년을 기점으로, 나는 이런 구린 글들이 전시 소개 글이나 보도자료에 더 빠르게, 더 비슷한 톤으로 유통되고 있다고 느꼈다. 특히 짧은 호흡으로 소비되는 인스타그램에서는 미술을 소개하는 양산형 콘텐츠가 늘어나며 이 납작해짐의 문제가 더 또렷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무렵부터 @crakti에 기록하는 일이 유독 버겁게 느껴졌다. 챗GPT가 등장하기 전부터 이미 미술 언어에 절여져 있던 내 글이, 어느 순간 AI가 생성한 문장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2,200자와 20장의 이미지로 제한되는 인스타그램이라는 포맷과, 글이나 말로 환원되지 않는 수많은 디테일을 품은 미술은 본질적으로 충돌하기에, 어쩌면 같이 갈 수 없는 일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계정을 통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여러 시행착오 끝에 내가 택한 방식은 단순하다. 먼저 당장 보이는 것과 느껴지는 감각에 머무르기로 했다. ‘이 작품의 노란색이 내가 어젯밤 먹은 고구마 색깔과 비슷하다’는 아주 사적인 인상부터, ‘자유로워 보이지만 실은 촘촘하게 설계된 전시의 동선이 우리 사회가 약속하는 자유의 환영과도 연결된다’는 생각까지. 감각의 복잡성과 밀도는 다양하다.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느낀 것에 집중하며 결론을 서둘러 닫지 않는 것이다.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본 라시드 존슨Rashid Johnson의 〈Untitled (Shea Butter Table)〉(2016)
또한 작가나 작품을 하나의 판단이나 의의로 빠르게 봉합해 버리는 태도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전시 서문과 작품 소개 글에서 ‘사회의 위계질서와 체제를 전복했다’라는 식의 거창한 진단을 어렵지 않게 마주친다. 그런데 작품 하나로 사회의 구조가 실제로 전복되는 일은 거의 없다. 내일도 우리는 각자의 상사에게 머리를 조아릴 것이고, 누군가는 아동과 여성의 착취된 노동으로 부를 축적하며, 누군가는 당장의 생계를 걱정해야 할 텐데 대체 어떤 작품이 무슨 체제를 전복했다는 말인가?
여기서 내가 문제 삼는 것은 작가들의 시도가 미비하다는 점이 아니라 그 노력을 ‘전복’이라는 단어 하나로 퉁쳐버리는 단정적 서술 방식에 있다. 물론 이론적 틀과 방법론을 통해 하나의 작품이 더 큰 맥락에서 무슨 의미를 갖는지 논의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이는 충분한 검증과 논쟁이 가능한 자리에서 다뤄질 문제지, 2,200자로 제한되는 인스타그램에서 ‘이 작가는 체제를 전복했답니다’라고 말하고 끝낼 사안은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내 계정에서 할 수 있는 말의 최대치는 이 정도다. ‘나는 이 전시를 보고 이렇게 느꼈는데, 당신은 어떻게 느낄지 모르겠다. 가능하다면 직접 와서 보시라.’ 진위를 단정하기보다는 개인적인 감상을 좀 더 드러내는 것이 전시와 작가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 있어 소셜 미디어의 장점을 가장 잘 활용하는 방식이라고 믿게 되었고, 이런 태도는 자연스럽게 @crakti가 소위 ‘공신력 있는 계정’이 아님을 자꾸 드러내는 방향으로 이어졌다.
계정의 성격을 하나로 규정하는 대신, 전시 정보 공유와 감상 기록, 작업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제도권의 안팎을 보여주는 영상, 그리고 개인적인 메모가 느슨하게 뒤섞인 구불구불한 정체성을 일부러 유지하기로 했다. 이것이 글로는 결코 환원되지 않는 미술을 가장 정직하게 대하는 방법이라고 (지금은) 믿는다.
크락티(박지민) @smjmp
직접 다녀온 전시를 소개하기 위해 시작했지만, 플랫폼의 한계를 체감하며 정체성이 점차 모호해지고 있는 인스타그램 계정 크락티(@crakti)를 운영한다. 현재 뉴욕에서 미술사와 미술 비평을 공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