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구홍 — 편집하지 않는 편집

민구홍 — 편집하지 않는 편집

01.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2025년 설립 10주년을 맞았다. 1인 기생 회사인 만큼 지난 10년은 무언가를 이룩한 기록보다 이룩하지 않기로 한 선택의 목록에 가깝다.


숫자 10은 회고를 강요하곤 한다. 돌이켜보면 회사는 더 많은 웹사이트를 제작할 수 있었고, 더 많은 전시에 이름을 올릴 수도 있었으며, 조금 더 큰 숙주에 기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가능성은 대개 미뤄지거나 기각됐다.


2015년 전시 공간 시청각에서 「회사 소개」를 발표한 이래 회사는 글쓰기와 웹을 컨베이어 벨트 삼아 미술 및 디자인계 안팎에서 활동해 왔다. 그 기저에는 늘 ‘편집’이 자리했지만, 이번에는 특별히 또 다른 ‘편집’, 즉 ‘편집하지 않는 편집’에 관한 몇 가지 사실을 기록해 둘까 한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10년은 무언가를 다듬어 완성하기보다, 편집하지 않아야 할 순간을 포착하고 끝내 방치하기 위해 고군분투해온 유보의 누적인 까닭이다.

 

02.


이따금 회사 주소가 궁금하다는 이메일에 친절한 설명 대신 한 웹사이트의 주소로 답장할 때가 있다. 2018년 업데이트가 멈춘 웹사이트의 푸터에는 당시의 임시 숙주 주소가 남아 있다. 누군가 그 지도를 따라간다면 지금은 사라진 건물이나 이름 모를 카페 앞에 당도하게 될 터. 오류를 깔끔하게 수정하는 대신 모호하게 방치한다. 회사가 점유하는 진짜 좌표는 물리적인 땅 위가 아니라 서버 속 어딘가, 또는 누군가의 웹 브라우저 탭 사이에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03.


송예환을 시작으로 그동안 제법 많은 인턴이 민구홍 매뉴팩처링을 거쳐 갔다. 2026년 현재 인턴은 김재연, 백창인, 한용파, 전경석. 총 네 명이다. 게다가 앰버서더 구난후, 전속 모델 박현지, 후속 전속 모델 박베리까지. 회사는 느닷없이 자연스럽게 모인 사람들로 시끌벅적하다. 그렇게 우리는 새로운 질서와 함께 금요일마다 산뜻하게 비밀스러운 시공간을 경험한다. 오는 이는 막지 않고, 가는 이 또한 붙잡지 않는다. 사람을 붙잡아 두는 편집은 회사에서 특히 먼저 포기한 기술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나는 이따금 소망한다. 그들과 되도록 오래 함께하면 좋겠다고. 물론 상쾌한 공기가 통하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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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시작하지 않는](https://products.minguhongmfg.com/never-starting)은 릴레이 소설을 위한 웹 애플리케이션이다. 단, 작가가 이어서 써야 하는 것은 뒷이야기가 아닌 앞이야기다. 어떤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야기는 시작하지 않는다. 줄곧 시작이 유보되는 탓에 어쩌면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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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음... 비밀이에요.” 거의 모든 질문에 인턴 한용파는 이렇게 답하곤 한다. [드러내고픈 비밀](https://products.minguhongmfg.com/open-secrets)은 누구보다 비밀이 많은 한용파에서 비롯된 웹 애플리케이션이다. 어떤 비밀은 과감히 드러낼수록 흐릿해진다고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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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최근 전시를 마련한 인턴 김재연에서 비롯된 웹 애플리케이션 [방명록](https://products.minguhongmfg.com/guestbook)은 말 그대로 온라인 방명록이다. 사용자는 이름 또는 이름 아닌 것을 남겨야 한다. 오늘도 전시장에 상주하는 이 땅의 모든 작가들에게 축복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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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 배포하는 웹 애플리케이션의 버전은 대개 1.0.0을 초과하지 않는 언저리에 머물러 있다. 시멘틱 버저닝에서 1.0.0은 완성 또는 정착을 뜻하지만, 이는 곧 더 이상 편집이 불필요하다거나 불가능하다는 선언처럼 들리기도 한다. 기능을 추가하는 대신 덜어내고, 화려한 인터페이스를 뽐내는 대신 글자로 대체하는 과정에서 애플리케이션은 점점 빈약해진다. 하지만 그렇게 생긴 빈틈 덕에 사용자는 도구의 용도를 직접 모색할 수 있고, 그때 도구는 비로소 도구 이상의 무언가가 된다.

 

08.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는 매년 정기적으로 도메인을 구입한다. 이 가운데 실제 웹사이트로 구현되는 것은 3할 미만으로, 나머지 7할은 결제일로부터 1년 뒤 속절없이 만료된다. 누군가에게는 자원 낭비로 보일지 모르지만, 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누리는 비용에 가깝다. 웹사이트 없이 만료된 도메인 목록을 찬찬히 훑어보는 것은 한때 원대하게 품었으나 다행히 실현되지 않은 성근 욕망을 목격하는 일이다. 그 덕에 인터넷은 조금이나마 덜 어지러워지고, 회사는 비용 몇만 원으로 우아함과 거리가 먼 아이디어에서 해방된다.

 

09.


12월 29일, 오랜 친구 조주희(@jojuhui) 씨의 생일을 맞아 웹사이트(https://jojuhui.kr)를 선물했다. 작업은 일주일 정도 걸렸을까. 나를 움직인 것은 2008년부터 디자이너와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해 온 그의 작업과 생각을 조금 더 들여다보고픈 욕망이었다. 깜짝 선물을 마주한 그의 소감은 “음... 나쁘지 않네.” 결정하지 못한 채 결국 주석으로 처리하고 미뤄 둔 불완전한 부분을 감지했음이 분명했다. 한편, 며칠 전 워크룸의 김형진(@wkrm02) 선배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웹사이트를 선물하는 건 제법 괜찮은 일 같아요. 그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고, 그에 관해 잘 몰랐던 것뿐 아니라 심지어 전혀 알고 싶지 않은 것까지 알게 되더라고요. 그나저나 그동안 선배님이 쓰신 글을 모은 웹사이트는 언제 선물해 드릴까요?“ 선배는 내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선물은 모름지기 깜짝 선물이어야 한다는 뜻임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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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민구홍 매뉴팩처링에는 인스타그램 계정(@minguhongmfg)이 있다. 게시물이라고는 팔로우를 권하는 아름다운 영상 세 편뿐이다. “내일부터 하려고요.” 나를 채근하는 이들에게 늘 이렇게 말해 왔다. 이튿날에도 묻는 이에게는 “아무래도 내일부터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게으르고 고약한 청개구리 심보 같지만, PC 통신과 유즈넷을 시작으로 꼬마 때부터 여러 서비스에 심취해 본바 소셜 미디어는 나를 늘 위험에 빠뜨렸고, 그 뒤로 사람들과는 다이렉트 메시지보다는 이메일, 그보다는 전화, 그보다는 직접 만나는 쪽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영화 「사랑의 블랙홀」에서 빌 머리가 연기한 필 코너스의 마지막 대사(“오늘은... 내일이에요!”)처럼 결국 내일은 언젠가 오리라. 그러니 회사에 조금이라도 호기심이 이는 이라면, 아름다운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일단 (영상 세 편 가운데 하나를 감상한 뒤) 팔로우해 두기를 권한다.


mgmfg.mov

 

11.


“과거로 완벽하게 돌아갈 수 없다면, 과거를 편집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편집되지 않은 채 남는 편이 여러모로 이로운 과거도 있다. 무언가를 매끄럽게 다듬어 ‘완성’이라는 마침표를 찍고 싶은 유혹을 이겨내는 것, 즉 불완전한 틈을 남겨 두는 것, 즉 ‘편집하지 않는 편집’을 지속하는 일에는 오히려 ‘편집’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의도적인 불완전함 덕에 회사는 비로소 박제되지 않고 여전히 굴러간다. 이는 내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여백을 여백이 아니라 채근하며 깜빡이는 커서 덕에 비로소 다음 문장을, 다음 코드를 쓸 수 있다.

 

민구홍 @minguhong.fyi

안그라픽스와 워크룸에서 15년 가까이 편집자, 디자이너, 프로그래머 등으로 일한 한편, 2015년부터 ‘민구홍 매뉴팩처링’을, 2016년부터 ‘새로운 질서’를 운영한다. 2026년 현재 안그라픽스 랩(약칭 및 통칭 ‘AG 랩’) 디렉터로 백창인과 함께 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