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소윤 — 12일간의 뉴욕 일주: 못다 한 이야기
1
기내에서 영화 〈비포 선라이즈〉를 보는 사람이 있으려나. 그것 참 민망한 일일 테지만 내가 한번 그 짓을 해보고 싶었다. 평소 속으로 가장 자주 되뇌는 말은 ‘그래, 네 똥 굵다’인데 이 아름답고 총명한 커플의 대화는 잠자코 따라가게 되었다. 이런 인간들을 좋아할 여력이 여전히 있다니, 가히 희망적이기까지 했다.
2
고등학생 시절, 각자에게 꼭 맞는 〈해리포터〉 속 인물을 매칭해주며 친구들과 논 적이 있다. 혜진이는 헤르미온느, 민정이는 루나 러브굿… 나는 누구일지 조금 설렜고 시리우스 블랙이면 좋겠다 싶었는데
“소윤이는 모우닝 머틀…?”
화장실 유령 머틀이라니. 나 왜 유령이야, 나 왜 머틀이야, 따져 물었는데 애들은 배를 잡고 꺽꺽 웃을 뿐이었다. 한 놈이 눈물을 훔치며 한다는 말이
“넌 화장실에서 살다시피 하잖아.”
하긴 내가 화장실에서 살긴 한다. 과민성대장증후군이 있거니와 화장실에서는 혼자 조용히 앉아 있을 수 있어서 좋다. 이런 나를 잘 아는 분께서 뉴욕 공중화장실 위치를 알려주는 앱을 추천해주셨다. 그분께 내가 얼마나 감동받았는지는 미처 다 표현하지 못했다. 너무 외로운 사람으로 보일까 봐.
3
밤 10시 30분에 시작하는 오픈마이크에 참여했다. 오픈마이크가 끝난 뒤, 독거미의 아우라를 풍기는 언니가 내게 다가와 ‘매력적’이라고 했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워낙 화통하고 예뻤기에 나는 입이 바짝 말랐다. 그때 눈치 없는 몸짱 백인이 옆에서 초를 쳤다.
“아까 세트 못 들었어? 결혼했다잖아. 냅둬.”
“에이 뭐야, 근데 괜찮아. 내가 처치하면 되지.”
처치…? 코피가 터질 뻔했다. 나를 뒤흔들어 놓은 독거미 여인은 백인 남자와 팔짱을 끼고 자리를 떠났다. 나는 당장 언니를 쫓아가 묻고 싶었다.
“남편을 처치한다고요? 그다음에는 저랑 무얼 할 건데요? 저로 뭘 하고 싶으신데요?”
하지만 직감할 수 있었다. 언니랑 사랑하게 되면 엄청 아플 거라는 사실을. 전날까지만 해도 나는 특파원이라도 된 양 남편에게 미주알고주알 소식을 전하곤 했는데 독거미 여인에 관한 이야기는 차마 하지 못했다. 남편도 코피가 터질까 봐.

4
아빠한테 어제 오픈마이크를 좀 잘했다고 했더니 통화를 마치자마자 아빠가 카톡 상태 메시지를 바꿨다.
‘소윤, 뉴욕을 점령하다!’
미쳐, 정말. 역시 아빠한테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오픈마이크에 출석했는데 백인 남자애들이 저마다 마이클 B. 조던을 질투하는 농담을 해서 웃겼다. 나도 두아 리파 질투하는 농담을 하나 만들어볼까나.

5
타임스퀘어 광장을 지나는데 풍문이 떠올랐다. ‘코스튬한 인간들과 사진을 찍어선 안 된다, 결국 돈을 요구할 거다.’ 조금 두려워하며 거리를 걸었지만 내게 무식하게 달려드는 이는 없었다. 게다가 코스튬이 영 코스튬 같지가 않았다. 너무 낡고 꼬질꼬질해서.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리기 위해 입은 게 아닐까. 내게는 사제의 하얀 수도복이 오히려 코스튬 같아 보였다. 이런 생각 하며 광장을 지나 밥 먹으러 가는 길, 아프리칸 노숙인이 백인 노숙인 손에 달러를 꼭 쥐여주는 모습을 보았다. 백인 노숙인은 약에 잔뜩 취해 있었고 금방 그 돈을 잃어버릴 게 분명했는데도.

6
뉴욕코미디클럽 오픈마이크에 갔다. 젊은 남자애들이 모여서 천덕꾸러기 티모시 샬라메에 대해 욕하다 옹호하다 우왕좌왕 대화하더라. 눈빛에 장난기가 가득한 곱슬머리 남자애가 꼴에 어울리지 않는 진지한 말투로 주장했다.
“연기상에는 젠더 구분이 사라져야 해. 〈센티멘탈 밸류〉 여주가 그냥 전체 연기대상을 탔어야 한다고.”
곁에 있던 라틴 남자애가 말을 이었다.
“대신 인종 구분이 생겨야겠지.”
나중에 대화해보니 라틴 남자애는 남은 음식을 염가에 판매하는 식당 앱의 애용자란다.
“그런 게 가능해?”
“응, 그런 게 가능해. 게다가 난 늘 배고프거든.”
문득 『달의 궁전』 주인공과 이 남자애가 겹쳐 보였다. 이 애에게도 아껴 놓은 계란 두 알이 있지 않을까.

7
뉴욕에서 살면 물가, 거주비, 치안 말고 대체 뭐가 문제려나. 이 셋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그렇게까지 중요한가. 이민의 꿈을 남편한테 고백했는데 남편이 마침 자신도 큰 그림을 그려봤단다. 얼씨구,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오른다더니.
“네가 뉴욕 코미디언이 된다면 나는 뉴욕에서 수학교육 저술가로 활동하려고.”
“〈수학 콘서트〉 〈수학 비타민〉 같은 걸 쓰겠다는 거지? 근데 내 책도 아직 해외 출간이 안 됐는데…”
“너야 그렇겠지.”
“참나, 어쨌든 너도 뉴욕이 좋다는 거지?”
“응, 들을수록 점점 더.”

원소윤 @barefoot_won
스탠드업 코미디언이자 작가. 『꽤 낙천적인 아이』(2025)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