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희 — Need a paw?
"당신의 기대수명은 평균 수명보다 10년 이상 앞당겨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86세가 여성 평균 수명이니까 약 70대 초중반 정도네요."
2023년과 2024년, 이 두 해는 유난히 고됐다. 이미 번아웃 상태로 진입한 데다가 하루도 쉴 틈 없이 바빴다. 몸까지 좋지 않아 병원에 가보니 특정 호르몬에 문제가 있었다. 그리곤 의사로부터 저런 말을 들었다.
???? 이게 무슨 말이지??? 갸웃거리며 집에 돌아왔다. 치료를 제대로 받지 않을까 봐 겁을 준 경고성 멘트라 여기기로 했다. 그런데 참 이상도 하지. 그날도 여느 때처럼 바삐 업무를 쳐내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별안간 허무가 벼락같이 쏟아져 내렸다. 삶의 근원적 허무가 폭발했다.
바쁜 일상은 한국을 살아가는 모든 이의 ‘기본값’이다. 모두 함께 쾌속으로 질주하기에, 피로감에 대한 엄살조차 부리지 못한다. 우리는 아주 자주 '수명을 끌어 쓴다'고 농담한다. 그런데 그 일이 정말로 일어난 거다.

신들이 모이는 산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2024, 국립현대미술관)
조 도깨비 영숙 (2024, 세종문화회관)
나는 전업 예술가다. 통념에 저항하며 관람의 구조를 통해 내용을 전하는 공연을 만들려 노력해 왔다. 비상업적인 동시에 탐구적 태도로 작업을 지속하고 있는데, 이 말인즉슨 나의 노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환가치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삶을 도구적 가치 기준으로 바라보지 않으려 해도, 산업주의가 심어 놓은 생산성의 논리에 속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능력주의와 성취주의의 함정에 빠진 채 세상에서 소외감을 느꼈다. 그런 한편, 내 안의 비판자는 이런 감정조차 어리석다며 끝없이 논리를 부정하고, 결국 나를 번아웃으로 몰아갔다.
해파리 만개에 관한 기록 (2024, 서울대학교 파워플랜트)
2025년은 창작을 멈추고 생계를 위한 최소한의 일만 했다. 첫 석 달은 내리 잠만 잤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잠을 잘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긴 수면에서 깨어나자 비로소 아주 작은 욕구가 생겼는데, 그건 다름 아닌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마음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나 자신에게만 매몰되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에서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의 에세이를 읽기 시작했다. 인터뷰를 찾아보기도 하고, 소설을 읽을 땐 인물에 집중했다. 그렇게 일 년 가까이 타인에게로 시선을 돌린 후에야, 내가 원하는 삶의 형태를 알아챘다. 친구들과 함께 미래를 설계하며 사랑 속에서 살아가고픈 마음. 그게 전부였다.

나의 고양이들 이름을 거꾸로 적으니 gudong label이 되었다.
2026년,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연습을 시작했다. 내가 타인에게 마음을 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봤다. 그러자 나의 제작 능력이 달리 보였다. 직업이 될 만큼의 전문성은 없기에 애매하다 여겨왔는데. 교환가치가 없는 능력이라면 교환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간 작업 과정 속에 숙련된 것들. 마치 가사일처럼. 누군가 매일 할 때는 존재감이 없다가, 아무도 하지 않을 때 빈자리가 보이는 일. 그 능력을 나누기로 했다. 고양이 손이라도 필요한 사람들에게.
어느 날, 좋아하는 음악가가 업무 스트레스로 괴로워하는 트윗을 보았다. 예전 같으면 하트를 누르고 말았을 텐데, '나눔'을 마음먹어서인지 이상한 용기가 솟구쳐 DM을 보냈다. 대충 이런 메시지였다. "Need a paw?" 음반을 반복해서 들으며 소개글을 적고 업무를 돕다 보니 기분이 좋았다. 음악이 좋았기 때문이었을까, 이상한 밤이었다. 충만한 기분을 안고 잠자리에 누웠더니 아—-----주 오랜만에 노래하고 싶은 기분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어쩌면 다시 음악 작업을 시작할 수 있는 걸까?
한동안 신체와 정신의 변화 속에서 모든 가능성을 상실한 기분에 침잠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상실감이 무엇인지 안다. 어린 시절에 꿈꾸던 가능성의 세계가 저물고, 다른 가능성의 문을 열어야 하는 전환기의 진통이었음을.
온통 나뿐이었던 세계를 벗어나, 이제는 체제에 순종하지 않는 아티스트를 위한 레지던시 운영을 꿈꾼다. 돈 한 푼 없이 꾸는, 문자 그대로 ‘꿈’이지만 말이다.
‘구원은 셀프’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나도 동의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구원은 셀프가 아니다. 타인에서 또 다른 타인으로 흐르기도 하고, 반대로 손을 내민 쪽이 되레 살아나기도 한다.
번아웃의 끝에서 생은 단일한 사건이 아닌 흐르는 상태임을 배웠다. 그래서 이제는 나를 속박하던 마음들을 버리고 이렇게 살아가려 한다.
"Lend me a paw."
마침내 회생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나와 맞잡은 우리 고양이 손
박민희 @_parkminhee
공연창작자, 음악가. HAEPAARY 보컬이자, 음악 비평지를 발행하는 모임 ‘오작’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 전통음악의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볼 때 발생하는 인식론적 어긋남을 재료로 공연을 만든다. 한국의 사회적 지형에서 전통음악의 의미와 방법론을 찾아가는 것이 작업의 출발점이다. 음악의 구조와 사회적 의미 등 실질적이고 미학적인 문제들을 작품의 구성 조건으로 적용하여 노래하는 행위와 듣는 행위의 장치적 맥락을 재편성한다. 대표작으로는 〈신들이 모이는 산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춘면곡 Hanging Bed〉, 〈가곡실격: 방5↻〉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