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하인드 더 렌즈 — 재밌는 사람을 찾는 가장 음침한 방법

비하인드 더 렌즈 — 재밌는 사람을 찾는 가장 음침한 방법

저장해둔 게시물이 37개인데 쓸 게 없다. 막막한 마음에 오늘도 남의 팔로잉 목록을 뒤졌다.

지난 11월 말부터 behind the lens라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운영하고 있다. 크리에이터들의 작업 과정과 생각을 디깅하고 기록하는 계정이다. 본업이 따로 있어서, 9시부터 6시까지 회사 일을 하고 퇴근 후 본격적으로 컨텐츠 디깅이 시작된다. 오늘은 퇴근 이후 나의 루틴을 기록해 보려고 한다.

18:00 퇴근 후, 옆 테이블로 이동

재택으로 일하다 보니 퇴근과 동시에 바로 콘텐츠 작업이 가능하다. 일이 끝나면 옆 테이블로 자리를 옮기고 인스타를 킨다. 오늘은 뭐가 재밌나~ 하면서 가볍게 훑어보는 시간을 가진다.

옆 테이블에 놓여있는 개인 맥북

18:30 저녁 먹기

집중력... 다들 안 좋으시죠? 저도 안 좋습니다. 30분 만에 밥을 먹으러 간다.

저번 주에 먹은 봄동 비빔밥

19:30 운동하기

하루 종일 앉아 있다 보니 몸이 점점 굳어가는 게 느껴진다. 얼마 전에는 핏한 후드티를 입으려다가 목에 담이 걸려서 고생하기도 했다. (아직 이럴 나이는 아니라고 믿었는데) 그래서 요즘은 최소 30분이라도 요가를 하려고 한다.

20:00 다시 책상 앞으로

다시 인스타를 켜고 본격적으로 주제를 찾는다. 저장해둔 게시물은 30~40개가 넘는데, 막상 쓰려고 하면 끌리는 주제가 하나도 없는 이 기이한 현상. 인스타는 비슷한 것만 계속 보여줘서, 계속 유사한 스타일과 깊이의 콘텐츠만 쌓이게 된다. 이럴 때는 아예 다른 곳으로 이동해 디깅을 이어간다.

주제가 막힐 때 내가 주로 콘텐츠를 찾는 방식 3가지를 소개해 본다.

1. Substack

트위터와 유사하지만, 좀 더 긴 글 위주로 취급하는 플랫폼이다. 해외 패션 에디터나 마케터들이 주로 글을 써서, 그들의 글을 읽으며 아이디어를 얻는다. 주류 매거진에는 실릴 수 없는 매우 솔직한 의견들이 오가서 트렌드에 대한 분석이나, 반응들을 빠르게 보고 체감할 수 있다.

i-D 매거진 편집장 Thom Bettridge의 Substack

2. New York Times, 1Granary 등의 해외 매체

사실 뉴욕타임스에서 다뤘을 만한 주제면 이미 한물 갔다고도 표현하는데, 그래도 봐본다. 잘 쓰인 글을 읽는 재미도 있고, 조금 더 공신력 있는 근거나 맥락이 필요할 때 도움이 되는 매체들이다.

자.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뭐가 없다? 이제부턴 조금 음침한 방법을 쓸 수밖에 없다.

3.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팔로잉 목록 들어가기

원래 디깅은 약간 음침한 면이 있는 법! 별건 아니고, 말 그대로 좋아하는 작업자의 인스타그램 팔로잉 목록을 싹 훑는 거다. 요즘 Aidan Zamiri라는 사진작가를 좋아하는데, 그 사람이 누구를 팔로우하고 어떤 것들을 보는지 궁금해져 팔로잉 목록에 들어가 계정을 하나씩 눌러본다. 그러다 보면 내가 몰랐던 새로운 인물들을 발견하게 되고 디깅이 새롭게 시작된다.

Aidan의 팔로잉 목록은 무려 4,000명이 넘는다.


21:00 주제 정하고 글 쓰기

이렇게 여기저기 쏘다니다 보면 흥미로운 사람 혹은 주제가 하나쯤은 튀어나온다. 흥미로움의 기준은 여러가지가 있을 텐데, 크게 두가지로 정리해 보자면



  1. 지금(2026년) 활동하고 있는 사람인가

아무래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관심이 간다. (또래면 더더욱) 나와 같은 시간과 시대를 살아가는 다른 작업자들은 어떤 의도와 생각을 가지고 작업하는지, 그 과정을 탐구한다.

18–24세를 위한 소셜 커뮤니티를 운영하고 있는 Grownkid를 다룬 게시물 (2026.02.07 업로드)
뭐 너네 아직 24살도 안 됐다고? 아 나이통 와..


  1. 입체적인 서사가 있는가

역경과 고난의 서사가 있으면 더욱 좋다. 정말 멋있는 작업을 했어도 그 사람이 금수저라면? 그에 대한 애정이 바로 식어버린다. 반면에, 엄청나게 고생하고 N잡을 뛰며 혹독한 환경에서 성취를 이뤄낸 사람이라면 너무 궁금하지 않나요…? 어쨌든, 내가 공감하고 이입할 수 있는 흥미로운 서사가 있는 사람이라면 가장 이상적이다.

SubwayTakes라는 인터뷰 콘텐츠를 진행하는 Kareem의 이야기를 다룬 콘텐츠 (26.01.23 업로드)
Kareem은 33살에 멀쩡한 직장을 때려치고 이 콘텐츠를 시작했다고 한다. 나도 앞으로 딱 5년만 더 방황해볼란다.

이 두 가지 요건을 만족하면 일단 주제로 킵해두고, 관련 기사나 인터뷰를 더 찾아보며 글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다.

23:30 업로드

원래 내 목표는 1일 1 업로드였는데, 최근에 처참하게 실패했다. 그래도 2~3일에 한 번은 꼭 올리려고 한다. 자정 전에 업로드를 마치고 나면 뿌듯함이 몰려오며 새벽 2시까지 마음 편히 릴스를 볼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하루가 또 흘러간다.


사실 1,000명을 기록하겠다고 선언해 둔 상태인데, 언제 채울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하루에 1명씩 올려도 3년이 넘고, 지금 속도대로라면 5년은 족히 걸릴 것 같다. 

1,000명이라는 숫자를 정한 것은 “제발 뭐라도 꾸준히 해보자”라는 생각에서 시작했다. 거창한 목표를 이루겠다기보다는 재밌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스스로 동기부여를 받고, “나도 이런 시도를 해볼 수 있겠는데?”라는 아이디어를 얻는 과정에 더 가깝다.


관련 업계에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디깅을 하나 싶다가도, 멀게만 느껴졌던 작업과 창작자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단순히 선망할 만한 대상을 찾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그들이 왜 흥미로운지, 어떻게 그런 성취를 이루게 되었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막연한 환상이 걷히고 어느 순간 훨씬 가까운 존재로 느껴진다. 그런 의미에서, 언젠가 Aidan을 직접 인터뷰하게 될 날을 기대해 본다.

Charli XCX의 영화 ‘The Moment’에 대해서 이야기 중인 Aidan과 Charli. 
Aidan은 이 영화를 감독했다. 현재 그는 Billie Eilish, Chappell Roan등 수많은 팝스타들과 함께 작업을 진행 중이다.

비하인드 더 렌즈 @behind_the_lenssse

카메라 뒤의 창작자들을 소개하는 인스타그램 매거진을 운영하고 있다. 화려한 결과 뒤의 치열한 과정을 디깅하고 정리하는 것을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