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화 ─ 그저 그런 것들을 찾아서

정준화 ─ 그저 그런 것들을 찾아서

<씨프 하트(Thief of Hearts)>(1984)라는 영화가 있다. 처음 들어봤다고? 그럴 만도 하다. 제리 브룩하이머가 무려 40여 년 전에 제작한 이 로맨틱 스릴러(?)의 IMDB 유저 평점은 5.8점이고 로튼토마토 신선도는 무려 0%다. 아무래도 대단한 걸작은 아닌 것 같고 완성도를 극복할 만한 흥행 성적을 거두지도 못했다.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게 오히려 당연하다.  

아무튼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 스콧(스티븐 바우어)은 젊은 부부가 외출한 틈을 노려 빈집 털이를 하다 여자의 일기장을 훔친다. 인테리어 디자이너인 미키(바바라 윌리엄스)는 시들해진 결혼 생활이나 섹슈얼한 판타지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디테일하게 기록하는 사람이다. 호기심이 생긴 스콧이 우연인 척 미키에게 접근하고, 일기의 내용을 참고해 그녀의 이상형을 연기한다. 둘의 만남은 <사랑과 전쟁>과 <그것이 알고 싶다> 사이를 오고 가는 미성년자 관람불가의 사건이 된다. 


<씨프 하트> 국내 개봉 당시의 지면 광고.
‘세상에 비밀 없는 여자가 어디 있겠읍니까마는, 비밀도 비밀 나름이죠…’
‘이자가 20만 여성 관객의 사랑을 몽땅 훔친 희대의 사랑 도둑이다!’
1980년대 영화 홍보 문구의 트렌드는 지나치게 구수한 아무말이었다.

 

그래서 재미는 있나? 모른다. 나도 못 봤기 때문이다. <씨프 하트>에 대해서는 지난 세기에 MBC에서 방영된 <퀴즈! 명화 여행>을 통해 처음 알게 됐다. 패널로 출연한 연예인들이 영화 클립을 함께 보면서 뒤에 이어질 상황이나 대사를 추리하는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나이에 맞지 않는 콘텐츠를 섭렵하면서 조숙한 척을 하는 취미가 있었다.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 영화에 대한 정보를 얻을 통로는 TV나 지면 광고, 가끔은 잡지 정도였다. 

어쩌다가 정보를 얻어도 직접 영화를 보는 건 여전히 쉽지 않았다. 혼자 극장을 다닐 나이는 아직 아니었고, 넷플릭스는커녕 비디오 대여점도 드물 때였다. 궁금한 작품이 마침 미성년자 관람 불가 등급인 경우도 흔했다. 여기저기서 얻은 자투리 정보를 단서로 삼아 <퀴즈! 명화 여행>의 출연자처럼 보지 못한 이야기를 추리하곤 했다. 늘 흥미진진했다. 볼 수 없는 영화에는 실망할 수도 없다. 

21세기의 어느 날, 황학동의 중고 LP 숍을 기웃거리게 됐다. 묵은 먼지를 배부를 때까지 마셨을 즈음 <씨프 하트>의 한국 라이센스 OST 앨범을 발견했다. 잊고 있던 기억을 오랜만에 떠올렸다. 


TV 광고가 음악 시장에서 틱톡 역할을 하던 때가 있었다. 광고에 삽입돼 바이럴을 타면 히트곡이 됐다. 조르지오 모로더가 참여한 주제곡 ‘Thief of Hearts’도 그런 경로로 한국 대중에게 알려졌다. 

 

이미 오래전에 성인이 됐는데도 아직 <씨프 하트>를 보지 못했다. 시장이 지각변동을 겪으면 어떤 작품들은 사라진다. VHS에서 DVD로, DVD에서 VOD로, VOD 중에서도 스트리밍으로 대세가 바뀔 때, 새로운 매체로 옮겨오지 못하고 과거의 매체와 동반 탈락한다. 이렇다 할 걸작도 아니고 흥행도 변변치 않았던 애매한 범작은 그렇게 잊히기가 쉽다. <로마의 휴일>이나 <사운드 오브 뮤직>은 넷플릭스가 저물고 새로운 미디어가 세상을 접수할 때까지도 살아남을 거다. <씨프 하트>는 VHS의 시대와 함께 유효 기간을 마쳤다.

 

아날로그 미디어에 대한 향수는 거의 없다. 조금쯤 갖고 있다고 해도 스트리밍 서비스의 편리함을 포기할 정도는 결코 아니다. 다만 미디어 환경의 변화에 휩쓸려 자연스럽게 도태되고 잊힌 영화들이 가끔은 아쉬워진다. 모두가 좋아하는 걸작에는 대부분 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하다. 그 거대한 공감대를 경험하는 것도 흥분되는 일이다. 하지만 그저 그런 범작에서 반짝이는 단면을 혼자 엿봤을 때만 알 수 있는 기쁨도 있다. 그저 그런 것들이 없어질 때마다 어떤 즐거움의 가능성도 함께 사라진다.

 

<씨프 하트> OST의 라이선스 LP 뒷커버에 인쇄된 소개글의 일부. 현란한 비문과 싼 티 나는 비유로 영화의 그저 그런 분위기에 쐐기를 박는다. 그래도 재미는 있음. 

 

정준화 @mrvertigo1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좋지만은 않아서 더 좋은 것들에 대해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