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건혁 — 투 머치 글리치: 의도하지 않은 즐거움
설계한 틀에서 벗어나 예측 밖의 결과가 생기는 것은 대체로 고통이 수반됩니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면, 삶에서는 뜻대로 되는 것보다 뜻을 벗어난 결과들이 더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뜻대로 살 수 없는 인생은 오로지 고통만 가득할까요? 결국 예정된 좌절이 기다리고 있다면, 애초에 계획을 세우지 않는 것이 좋을까요? 이런저런 시도를 하다보면 필연적으로 마주치게 되는, 글리치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컴퓨터 소프트웨어나 기타 기계 장치와 관련된 맥락에서 글리치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잠깐 발생하고 사라져서 고치기 어려운 문제를 말합니다. 이때 문제의 원인은 실제로 알 수 없는 기현상일 수도 있지만, 단순히 문제 발생 당시에는 알 수 없었던, 기술자의 설계 단계에서의 실수를 비롯한, 충분히 규명 가능한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분명히 무언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 결과로 생겨났음에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글리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이것은 글리치 아트로 발전합니다.
이 글리치 아트스러운 느낌의 이미지들은 2022년 9월 25일에 Shader Editor라는 안드로이드 앱에서 그렸던 것을 다시 재현한 결과입니다. 당시에 특별한 이유 없이 두드러기가 자꾸 올라오더니, 가끔 숨이 불편해져서 알러지 약을 처방받아서 먹고 있었는데요. 약 기운으로 졸리다보니 많이 누워있고, 누워있으니까 작업을 많이 못하는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어요. 그래서 누워서 핸드폰으로 코딩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설치한 앱이었습니다.
당시에 어쩌다가 이렇게 썼는지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 코드. 간략하게 요약된 규칙은 아래와 같습니다.
- 일정한 크기의 직사각형으로 화면을 구역으로 나눈다.
- 각 구역마다 무작위한 값을 뽑는다.
- 무작위한 값이 일정 기준을 초과하면, 해당 구역의 색을 새로 칠한다.
- 해당 구역의 무작위한 값이 기준보다 같거나 작으면, 이전에 그려진 전체 이미지에서 특정 위치를 참조해서 색을 칠한다.
- 이전에 그려진 이미지를 참조할 때, 화면 중앙을 기준으로 각 구역이 가진 거리에 비례하게 이미지를 축소한다.
- 참조하는 위치가 이미지의 범위를 벗어난다면, 이미지가 무한히 반복하면서 배치되어 있다고 가정하고 위치를 참조한다.
- 1~4의 과정을 반복한다.


이전에 사인함수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유사 랜덤 함수(주어지는 시드 값, 이를테면 픽셀의 위치에 따라 일정하게 무작위한 값을 만들어주는 함수)를 만들어서 사용해보기도 했고, 백버퍼(이전에 그려진 화면의 기록)를 활용해 이미지를 왜곡하는 작업도 시도해봤습니다. 당시에 이 둘을 활용하면 뭔가 나올거라는 예상은 있었지만, 공간의 면적을 흡사 트리맵 같이 불균일하게 나눈 것처럼 보이는 결과물이 생길거라는 기대는 없었기 때문에, 새롭게 느껴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목적 없이 기법을 탐구하다가 무언가 예상하지 못한 결과물을 만났을 때, 계획된 결과물보다 오히려 더 큰 즐거움을 느낄 때가 가끔 있습니다. 제가 더 똑똑하고 철두철미해서 만나지 못했을거라 생각하면, 저의 부족함이 사뭇 소중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는 무계획을 찬양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계획의 좌절은, 오직 성실한 계획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쌓인 노력이 무너질 때, 희박한 가능성으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글리치가 안배되어 있는 것은, 마치 누군가가 실패와 좌절에도 지나치게 절망하지 않도록 꼭꼭 숨겨둔 소중한 이스터에그 같습니다.

최건혁 @ch_gnhk
코드를 주된 도구로 사용하여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명확한 목적 없이 기법을 탐색하고, 그 과정에서 생겨난 이미지를 수집하고 기록합니다. 정확한 재현보다는 불완전한 구현에 집중하고, 그 축적의 흐름과 지속에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