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화 — 곰돌이 푸를 이길 수는 없겠지만
결국 나까지 책을 쓰고 말았다. 솔직히 털어놓자면 필요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책을 쓰는데 그중 적지 않은 수는 굳이 쓸 필요가 없었던 책이 아닌가 종종 생각하기도 했다. 물론 나 역시 세상에 반드시 필요한 책을 쓸 자신은 없었다. 만만치 않은 시간과 에너지를 써가면서 나무에 미안해질 일을 저지르지는 말도록 하자. 이렇게 디즈니 공주처럼 갸륵한 다짐을 품고 매일 사방에서 폭탄처럼 터지는 일들을 수습하며 바쁘게 살았다.
그러다가… 하던 사업을 정리하겠다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여기까지는 어떻게든 왔는데 앞으로도 계속 잘 헤쳐갈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당장 할 일이 없어지면 뭘 해야 하나? 쓰는 거라면 내일부터 곧바로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무래도 책을 써야겠다. 나무야 미안해. 일단 나부터 살고 보자.
7월에 출간된 《미안하지만 싫습니다》는 이런 우여곡절 끝에 완성한 에세이다. 대다수가 좋아하는 것에 관해 쓰니까 나는 싫어하는 것을 이야기해 보면 어떨까 싶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세상에 꼭 있어야 할 걸작을 쓰지는 못했다. 그래도 나무의 숭고한 희생이 지나치게 헛되지는 않기를 바라는 중인데… 그건 최대한 많은 사람이 직접 읽어보고 판단해 줬으면 한다(라고 아닌 척 영업 멘트를 날려 본다).

정준화, <미안하지만 싫습니다》, 몽스북, 2026
밤보다는 아침에 그나마 생산성이 낫다. 이 자리에 앉아 곧 지워버릴 문장을 쓰며 해가 뜨는 걸 보는 날이 많았다.
책을 내고 난 뒤 하루를 시작하는 루틴이 바뀌었다. 눈을 뜨면 스마트폰부터 찾는 버릇이야 여전하다. 하지만 졸린 눈으로 SNS를 뒤지는 대신 예스24, 알라딘, 교보문고까지 온라인 서점들을 한 바퀴 순례한다. 매일 아침 판매 지수와 순위가 업데이트되기 때문이다. 출간 후 몇 주가 지나가는 동안 《
미안하지만 싫습니다》는 에세이 카테고리에서 기대 이상으로 높은 순위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스르르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고군분투 중이다. 이래서야 작가로서 계속 뭔가를 쓰면서 살 수 있을까? 나는 대체 어떤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위로 올라가야 하는 걸까? 《어쩔수가없다》의 이병헌처럼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리스트를 못마땅하게 훑어본다.
차트 상위권에 《사랑스러운 강아지》라는 책이 눈에 띈다. 저자가 누군가 했더니… 몰티즈? 대체 어떤 내용인데? ‘몰티즈 앤 리트리버의 행복한 일상’을 다뤘다고 한다. 인기 캐릭터의 소소하고 따뜻한 이야기가 예쁜 그림과 함께 담겨 있다. 아니, 귀여운 강아지가 한 마리도 아니고 두 마리인데 이건 못 이기지. 별로 귀엽지 않은 중년의 인간은 빠르게 수긍한다. 개나 소…까지는 아니지만 어쨌든 개는 책을 냈고 심지어 그걸 베스트셀러로 만들었다. 사람보다 낫다.

잘 쓰는 건 개뿐만이 아니다. 곰 중에서도 인기 작가가 있다.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는 출간 첫해인 2018년에만 40만 부 이상을 팔아치웠다. 그럴 만도 하다. 푸는 1926년에 데뷔한 이래 차곡차곡 막강한 팬덤을 일궈온 메가 인플루언서가 아니던가. 심지어 나와는 다르게 성격까지 둥글둥글 좋다. 바지 말고는 딱히 부족해 보이는 게 없는 분이다.

최근 서점 매대에도 곰돌이 푸 못지않은 강력한 스타가 하나 버티고 있다. 이미 스테디셀러로 자리를 잡은 심리 에세이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가 헬로키티와 협업한 개정판을 내놓았다. 상큼한 표지를 보니 나도 좀 갖고 싶을 지경이다. 키티 님이 나를 지나쳐서 더 높이 또각또각 올라가시는 동안 바닥에 납작하게 붙어서 머리를 조아린다.

그 와중에 한참 앞에서 뛰어가는 누군가를 발견한다. 낯이 익은데… 혹시 하루키 선생님이신가요? 작가의 삶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마라톤에 관한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다. 하루키의 에세이는 실패하는 법이 없고 이 재미있는 책도 예외가 아니다. 달리기에 딱히 취미가 없는 나 역시 한참 전에 읽었다. 한국에 처음 출간된 2009년 무렵에. 그러니까 무려 17년째 스테디셀러이자 베스트셀러로서 끝나지 않는 마라톤을 하고 계신 셈이다. 이제 그만 좀 달리시고 저 같은 듣보잡이 한 권이라도 더 팔게 길을 비켜주시면 어떨까 싶은데… 물론 대작가는 나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앞으로도 정력적으로 수십 쇄쯤은 더 찍어낼 것이다. 먼저 가세요. 전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가만 보니 어느 책 하나 쟁쟁하지 않은 게 없다. 헬로키티에 하루키에 빅터 프랭클에 알랭 드 보통에 법륜 스님까지, 듣기만 해도 주눅이 드는 이름들이 잔뜩 포진해 있다. 그 외의 유명 작가들도 꾸준히 신작을 발표하며 나를 밀치고 지나갈 것이다. 과연 읽는 사람보다 쓰는 사람이 더 많아 보이는 출판 시장에서 기어이 버텨낼 수가 있을까? 심지어 베스트셀러씩이나 노리기라도 한다면? 이건 거의 자아도취적인 욕심이 아닐까? 거의 1년을 들여 쓴 책이 표지의 일러스트레이션처럼 우울한 표정을 하고 알 수 없는 어딘가로 떠내려갈 운명일까 봐 불안해진다.

책상 옆 벽 하나는 서가가 차지하고 있다. 헬로키티가 쓴 책은 아직 없지만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라면 갖고 있다. 써야 할 때 쓸 만한 게 떠오르지 않으면 뭐라도 가져다가 읽는다.
사실 책을 쓰는 행위는 거대한 나르시시즘의 증명일 수밖에 없다. 자신의 이야기를 불특정 다수에게 300여 페이지 분량으로 쏟아낸다는 것 자체가 웬만한 자기애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평생 자기혐오가 심한 사람인 줄 알았지만 책을 쓰고 난 뒤 그 생각을 고쳐먹기로 했다. 부끄러운 이야기를 순순히 자백한 걸로는 모자라서 그 이야기를 되도록 많은 사람이 읽어주기를 바라고 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아마 곰돌이 푸만큼 많이 팔아치우지는 못할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쓰기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을 뭐든 해보려고 한다. 단, 바지 벗는 것만큼은 빼고.

책을 내고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런 것도 했다. 3일간 《미안하지만 싫습니다》 한 권만을 판매한 팝업 서점 이벤트.
정준화 @mrvertigo1
좋은 것보다 싫은 것에 관해 이야기할 때 말이 좀 더 많아진다. 에세이 <미안하지만 싫습니다>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