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휘 — 나의 즐거운 일기: 전주영화제 편

이민휘 — 나의 즐거운 일기: 전주영화제 편

4월 29일 수요일 낮 1시 20분

어젯밤에 강요배 작가 개인전 영상 작업 끝내서 보냈고 이장욱 감독 <표면 기억 망각> 작업 아직도 안 끝났다. 내일 전주에 가는데 곡이 안 끝나서 연습을 많이 못 했다. 연습이 문제가 아니라 곡이 안 끝난 게 문제다. 아니 둘 다 문제지. 그렇지만 괜찮다.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곡 마무리하고 내일 연습하고 (어디서? 전주에서?) 뭐 모르겠네. 어떻게든 되겠지. 살려. 솔직히 이것은 내 잘못만은 아니다. 갑자기 15분짜리 피아노 곡을 즉흥으로 해달라고 하면 우째요... 저는 연주자가 아니랍니다. 즉흥을 하지 않는/못하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못한다고 할 걸. 그러나 후회하기엔 약간 늦은 감이 있다. 매진됐다고 함. 15분짜리 곡 길다. 이것은…... 길다.



피아노 곡을 61건반으로 작업하느라 시간 없는데 피아노랑 작업대랑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짜증난다. 쓰고 있던 잘생긴 88 도퍼 건반이 해머건반이라 아랫집에서 새벽에 들린다고 뭐라고 하길래 임시로 집에 있던 61 세미웨이티드로 바꿨는데 88 세미웨이티드는 도저히 사러 갈 시간이 없다. 하하하. 이번 이사 때 있는 돈 탈탈 털어 6면을 30센치씩 띄우는 방음공사를 했는데 완벽 방음 안 됨 + 아랫집 약간 소머즈 이슈로 이런 눈물나는 상황이... 진심으로 눈물이 나는 게 웃겨서 눈물 셀카를 찍을 뻔 했다. 어떻게 되겠지. 살려. 그만 투덜거리고 곡 쓰자. 갈 길이 멀다. (아랫집은 이제 신경쓰지 않아야겠다. 거의 들리지도 않을 정도의 소음이라는 걸 내려가서 확인함… 저는 먹고살아야 합니다...)




4월 29일 밤 11시


동네 피아노 연습실에 아까 마무리한 곡을 연습하러 왔다. 업라이트랑 그랜드피아노는 아무래도 느낌이 달라서 전주 가기 전에 한 번은 그랜드피아노로 연습해야 마음이 좀 놓일 것 같다.
연습을 했는데 여전히 틀린다.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오. 나보다 연주 잘하는 찐 연주자가 이 곡을 치면 좋을 텐데...




4월 30일 목요일
오전 10시

전주 간다. 다행히 오전에 짐을 다 싸고 기차를 탔다. 거의 매년 전주에 가지만 이 정도로 마음이 무거운 건 처음이다. 피아노 연습이 너무 덜 되어있다. 다행인 건 공연 장소에서 오후 5시 반부터 세 시간 연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숙소 도착하자마자 너무 스트레스가 심해서 맥주를 한 캔 땄다… 잠깐 시간이 있으니 밥을 먹어야겠어… 복집에 갔다가 한 명이라고 퇴짜 맞았다. 



4월 30일 목요일 오후 4시 반


갑자기 담당자로부터 6시부터 건물 전기 점검이라 다섯시부터 한 시간만 연습 가능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방금 순댓국을 시켰는데요... 입천장 까지게 먹고 바로 공연장으로 달려갔다.




4월 30일 목요일
6시

여전히 많이 틀린다. 정말 심란하군. 심란한 마음은? 술로 달래보자... 내일이 공연이니까 살짝만. 주성치라는 전주의 마지막 보루 같은 곳에 와서 정윤석 감독 만났다. 서부지법 폭동을 촬영하다가 기소된 정윤석 감독은 오늘 패소했다. 영화 감독이 현장 기록하다 잡혀서 범죄자가 됐다. 이게 말이 되나? 


박세영 감독 팀도 만났다. 모두 반가웠지만 그들은 마피아 게임을 했다. 내일모레 마흔인데 전주 영화제에서 이렇게 심란한 마음으로 새벽에 마피아 게임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인생 모르는 일이다. 게다가 내 마피아 연기가 후달렸는지 다 걸렸다. 2차 간다고 해서 빠졌다. 술게임을 더 하기엔 내일 공연이 너무 부담이다. 



5월 1일 금요일


오전 리허설 전에 공연장 아래층에서 피아노 연습 또 했다. 잠을 자서 그런지 덜 틀린다. 다행이다. 역시 사람은 잠을 자야 한다. 오늘이 메이데이라 차가 무척 막힌다고 한다. 


리허설 끝나고 어제 혼자 왔다가 입밴 당한 정태복이라는 복집에 다시 와서 이장욱 감독님과 복찜 먹었다. 여기 이번에 못 왔으면 정말 억울했을 것이다. 맛있었다. 복지리 먹으러 또 와야지. (결국 다시 가지 못함)


오후 5시 리허설인데 오전 9시에 출발한 남정현 첼리스트가 오지 않는다. 아직도 꽉 막힌 도로에 있다고 한다. 나의 운명은? 그의 운명은? 다행히 정현 씨가 6시 넘어 와서 급히 맞춰보고 관객 지연 입장으로 7시 10분부터 공연을 했다. 생각보다는 다행인데 아무래도 사람이 가득 차니 소리가 작아져서 내일 공연은 피아노 마이킹도 해야할 것 같다. 

전주국제영화제 제공

모더레이터로 온 영글언니가 반가워서 한 잔 했다. 내일 오전 공연이라 정말 많이 마시면 안 돼서 진짜 조금 마셨다. 전주 와서 이렇게 양껏 못 마신 건 처음이다. 

전주국제영화제 제공

숙소 들어가는데 누가 불러서 돌아보니 이와세 료 상이었다 ! ! ! <한여름의 판타지아> 후에 12년 만에... 만났다… 정말 방바방가바방가데스네 ㅠㅠ 이 사람 왜 하나도 안 늙었지... 난 폭삭 늙었는데... 어떻게 알아보신 것인가... 





5월 2일 토요일 

오전 11시 공연인데 사람이 많이 왔다. 기하 형 꺼 작업해서 전주 내려온 지윤해도 보러 와줬다. 원래 일찍 일어나서 오전 11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 지윤해는 내가 음악을 시작할 때 같이 시작해서 아직도 이 씬에 있는 몇 안 되는 친구 중 하나이다. 역시 오래 작업하려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하나 보다. 고마웠다. 

공연이 끝났다. 오... 그러니까... 정말로 끝났다. 맙소사. 뒤늦게 추가된 작업 때문에 고통스러웠으나... 필름 영사기 상영과 함께하는 연주는 처음이라 새로웠고 남정현 첼리스트와 12년 만에 협연해서 뜻깊었다. 우리 모두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을 하다가 이렇게 또 만나게 되었군요. 

전주국제영화제 제공

어제 한 번 해봤다고 문성경 프로님과 함께한 gv에서 말도 술술 잘 나왔다. (혼자만의 생각일 수 있음 주의) gv 질문 중 기억나는 질문. "디지털 작업은 최종본이 본인의 의도에 가깝게 만들어지는데 필름 작업은 촬영, 현상, (필름 영사기) 상영 뭐 하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고 컨트롤 되지 않는 부분이 크다. 필름 작업에서 본인의 의도에서 멀어지는 아웃풋의 리스크는 어떻게 하나?" 내 생각에... 어떤 작업도 본인의 의도대로 전달될 수는 없다. 모든 작업은 그것을 만드는 구조와 환경, 재료에 따라 얻는 것과 잃는 것이 다르다.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의 문제고 그것은 의도가 얼마나 전달되는지와는 조금은 다르게 작동하는 문제이다. 바이닐 작업을 예로 들자면 나는 청자가 내 음악을 무손실 wav 파일 스트리밍으로 들으면서 이것저것 넘겨서 듣는 것보다 음질 손실이 있을지언정 앨범의 서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 호흡으로 읽어주기를 원한다. 그에게 나의 의도가 얼마나 전달될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가능한 부분이 있다면.


점심 후딱 먹고 장건재 감독 <지축의 밤> 보러 갔다. 아무 정보 없이 간 건데 참 정갈하게 잘 만든 영화를 만났다. 난 역시 영화에 대한 영화나 드라마가 재미있더라. 감독님도 강진아 배우님도 피디님들도 다 오랜만에 반가웠다.



영화 끝나자마자 기차역으로 와서 기차를 탔다. 원래 공연 끝나고 이틀 더 전주에서 머물면서 영화도 많이 보고 놀 생각이었는데 도저히 그럴 팔자가 아니라서 기차표랑 숙소 일정을 변경했다. ㅇㅇㅇ 감독 차기작 <ㅇㅇㅇ>도, ㅇㅇㅇ 감독 차기작 <ㅇㅇ>도, 무엇보다 5월 28일 올라가는 국립극단 <노란 달> 작업이 너무 많이… 남아 있다. 정말 큰일이군. 

내일부터는 작업을 해야하지만 오늘은 도저히 기력이 없다. 마침 신도시 11주년이기 때문에 서울역에서 바로 신도시로 갔다. 김밥 사장님이랑 민준 님이 음악 트는 거 보고 고대영 작가가 큐레이션한 스크리닝 보고 피치트럭하이재커스랑 웩, 우희준 씨 공연 봤다. 체력이 바닥나서 희준 씨 공연 중간에 집으로 향했지만 잠깐이라도 마음의 고향을 방문할 수 있어서 좋았다. 집에 돌아오니 호동이와 철이가 늠름하게 나를 맞아주었다. 친구들 고마우이...



이번 전주영화제는 이렇게 끝났다. 이 정도로 영화를 많이 못 본 영화제는 처음이지만 가끔 이런 곳에 와서 늘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건 정말 반갑고 임파워링되는 일이다. 이장욱 감독님과 함께 한 공연 보러 와주신 여러분들 모두 감사드리고 우린 영화제에서 또 만나요. 그때까지 우리 모두 자신의 자리에서 몸 건강히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