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수 — 해적질 이후
『영화도둑일기』가 출간된 지 어느덧 2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나는 여전히 똑같은 짓들을 하고 있다. 영화 자막 사이트인 씨네스트에 접속한다. 요즘 씨네스트에서는 AI 자막이 화두인 것 같다. 새로 올라온 한국어 자막을 내려받는다. 자막을 열어 확인해 보니 AI로 번역 돌려놓고 따로 검수도 하지 않은 자막인 것이 너무 뻔히 보인다. 자막을 삭제한다. (최소한 두 줄 나눔과 마침표 제거 같은 기본은 지켜줬으면!) 한편 마스무라 야스조의 영화 세 편은 제법 믿음직한 자막 제작자의 번역으로 올라온다. 감사한 마음으로 영화와 자막을 내려받는다.

[1] 씨네스트에 올라온 마스무라 야스조의 ‘검정’ 시리즈
DM과 메일을 확인한다. 책을 낸 이후로 간혹 사람들이 문의해 온다. 이번에는 영화 평론가 K가 나에게 이러이러한 영화 파일을 구해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 나로서는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기에 비공개 토렌트 사이트에서 금방 그 영화들을 내려받아 보내준다. 대신 그에게 신작 스크리너 링크를 몰래 받는다. 나는 그 영화를 다운받고 클라우드 스토리지에 고이 모셔 둔다.
어느덧 나의 구글 드라이브에는 80TB 가량의 영화들이 모여있다. 어림잡아 8년 정도 수집/정리해온 것들이다. 구글 워크스페이스(구 G Suite)의 무제한 용량 정책은 폐지되었지만, 시스템의 허점을 잘 파고들면 지금도 계정 하나당 50~100TB 정도를 사용할 수 있는 기업계정을 만들어낼 수 있다. (단, 5명 이상이 필요하다, 상세한 방법은 문의!) ChatGPT나 Gemini에게 이 방주가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 것 같은지 의견을 물어본다. 두 모델 모두 대답은 비슷하다. 길어야 5년. 그 시간이 오기 전에 NAS를 사고, 외장하드를 사고, 3-2-1 백업을 하라고 권장한다.
하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 않다. 너무 많은 자료를 모아버린 탓에 엄두가 안 나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이전에 갖고 있던 그 활기가 시들었기 때문이다. 희귀한 영화를 찾아다니는 일이 더 이상 흥분되지 않는다.『영화도둑일기』를 쓰면서 생긴 한 가지 바람은 해적 동료를 찾는 것이었다. 원피스의 루피처럼… 하지만 책을 내고 나서도 그러한 동료는 거의 찾지 못했다. 친구들과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영화도둑일기 - 실천편』이라는 제목의 프랙티컬한 해적질 가이드를 해적출판하자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지만, 그걸 정말 실행에 옮겼을 때 따를 리스크를 쉽게 가늠할 수는 없었다. 머릿속에 리그 오브 레전드의 챔피언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비급이라니, 아껴두면 무슨 소용이야.
[2] 조나단 드미, <이번에는 나는 누구죠? Who Am I This Time?>
영화가 싫어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집에서나 극장에서나 일주일에 세 편 정도는 보고 있다. 최근에는 집에서 조나단 드미의 TV용 영화 <이번에는 나는 누구죠? Who Am I This Time?>를 보았다. 커트 보니것의 단편을 각색한 이 영화에서 크리스토퍼 워컨은 소도시의 아마추어 극단의 스타를 연기한다. 무대 위에서 날아다니는 그는, 막이 내리는 순간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는 사회적 결핍자로 돌아간다. 영화의 제목은 그가 자신을 캐스팅하러 온 연출자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그 질문을 잠시 나 자신에게 돌려본다. 이번에 나는 누구인가… 2년 전의 나라면 해적이라고 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희귀한 영화를 찾고 정리하는 데 쓰던 시간을, 요즘은 조금씩 피아노 연습에 쓰고 있다.
돌이켜보면, 예전부터 영화 속 피아노 장면에는 괜히 마음이 갔다.
고작 취미로 1년 반 정도 쳤을 뿐이지만, 요즘은 그런 장면들을 예전과는 조금 다른 마음으로 보게 된다. 아무튼 2026년의 목표는 아마추어 콩쿠르에 나가보는 것이다. 일단은.
최근에 연습했던 몇 개의 곡들.
F. Liszt - Bénédiction de Dieu dans la solitude
A. Scriabin - Fantasie Op. 28
한민수 @m19a9a
『영화도둑일기』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