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주화 — 미국의 잊힌 혁명가가 술과 약에 찌든 채 외친다. “F*CK!”
최근의 극장가를 생각하면 조급했던 마음이 조금은 느슨해진다. 자파르 파나히의 <그저 사고였을 뿐>을 비롯해 올해의 영화로 각인될 만한 작품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극장에 걸렸다. 광활한 논으로 뛰어 들어가 황금빛 곡식을 수확하는 농부의 마음이 이런 것일까. 혹은, 만선의 기쁨을 자랑하는 어부의 기름진 미소가 이와 비슷한 것일까. 오랜만에 영화를 골라볼 수 있는, 풍족하고 영화로운 나날들 속에 있다. 그리고 마침내 ‘언니가 좋아하는 영화는 사람들이 안 봐.’라고 새침하게 말하던 친구에게 나도 이제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폴 토마스 앤더슨(이하, PTA) 신작은 보고 말하는 거니?’
내게 PTA는 존 카사베츠, 코엔 형제, 샤프디 형제, 그리고 친애하는 켈리 라이카트와 함께 가장 미국적인 이미지를 생산해 내는 감독이다. 신작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미국의 잊힌 혁명가 밥(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이 자신의 딸 윌라(체이스 인피니티)를 지켜내기 위해 벌이는 활극이다. 납치된 딸을 되찾기 위해, 16년 전 몸담았던 혁명 조직과 접촉하려는 밥. 그의 머릿속에 단체의 날카로운 서약이나 행동
강령은 남아있지 않다. 기억을 더듬어보지만, 암호를 떠올리는 데 실패한 밥은, 술과 약에 찌든 채 시종일관 외친다. “F*CK!” 분노와 환희, 그리고 인간의 가장 내밀한 성적 행위와 한없이 하찮은 짓거리들을 모조리 포섭하는 단어, ‘F*CK’. 카체이싱 시퀀스의 여파인지, 팔딱이는 PTA의 이미지들을 소화하는 것이 벅찼기 때문인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는 멀미를 하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OTT에 패망한 시네마의 부활을 외치는 것 같은, 미국의 건재한 시네아스트가 지난 세기부터 착실하게 쌓아 올린 이 세계관을 우러러볼 수 있는 표현을 생각해 내고 싶었다. 그리고, 밥이 수없이 외치던 단어를 떠올렸다. ‘F*CK!’
미국의 역사는 타인의 역사를 욕보이면서 시작되었다. 아메리칸 드림은 그저 거대한 판타지일 뿐임을 증명하는 픽션. 광활한 영토를 손에 넣었지만, 결코 자랑스럽게 쌓일 수 없는 텅 빈 역사를 겨냥하는 경건한 시네마가 바로 PTA의 세계이다. 이 세계는 다양한 방식으로 ‘F*CK’과 관계 맺고 있다. 영화는 감독의 전작들을 불러들이는데, 개인적으로는 <부기 나이트>와 <매그놀리아>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물론, 이 두 영화는 내가 꼽는 PTA의 최고작들이다. 자신의 ‘물건’을 영광스럽게 삼기 위해, 포르노 업계로 뛰어든 에디를 떠올려보라. 에디가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면 할수록, 그는 동시에 수치심의 대상이 된다. 결코 양지로 나아갈 수 없는 부끄러운 영광. 나는 이러한 도식 위에 미국의 역사를 대입시켜 보곤 했다. 윌라의 어머니이자, 조직을 배신한 테러리스트 퍼피디아(테야나 테일러)가 록조(숀 펜)에게 행하는 행위도 이와 유사한 것이다. 자신의 신체와 알량한 자존심을 곧추세울수록, 그는 추한 존재가 된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뒤뚱거리며 가파른 도로를 걸어오던, 추함의 불사신 록조는 미국의 과거이자 현재, 미래를 동시에 표상한다. <매그놀리아>를 비롯한 <마스터> 등에서 반복적으로 그리고 있듯, PTA는 존경할 수 없는 아버지, 국가. 다시 말해 허울뿐인 역사를 회고한다.
내 앞줄에서 영화를 보던 미국인들이 떠오른다. 그들은 한 손에 맥주를 쥐고, 호탕하게 웃으며 영화를 보고 있었다. 순간, 그들이 부러워질 지경이었다. 자신의 역사를 마음껏 조롱할 수 있는, 다시 말해, 우러러볼 수 없는 부끄러운 특권을 지닌 자들의 마음은 어떠할까. 상영관이 줄어들고 있는 것 같지만,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당신의 162분을 위탁해도 전혀 아깝지 않은 영화이다. 개인적으론 PTA가 텅 빈 영화관을 향해,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라고 선언하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뉴욕에 사는 미국인 친구에게 이 영화에 대한 소감을 물었는데, 그의 답은 이랬다.
‘Oh, it’s f*ckin’ good, honey.’
어쨌든 PTA 영화를 볼 땐, 모두가 ‘F*ck’을 떠올린다는 거다.
___________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 비탈리 카네프스키의 1990년 작품. 1940년대 소련의 풍경을 열두 살 소년 발레르카를 통해 재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