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정 — 60유로 사용법
올해 중순, □로부터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그 편지에는 □이 바라본 나의 좋은 면면들이 세심하게 놓여 있었다. 그중 "여행에 재능이 있는 것", "아름다운 것들에 시야가 훤한 것"이라는 문구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있다. 자신은 여행을 잘 못하는 사람이라며 고백하던 말도 떠오른다.
내가 여행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즉흥적이고 게으른 면모 때문일 것이다. 즉흥과 게으름은 마음이 향하는 방향을 잘 알아차리는 단어들이다. 나에게 여행은 즉흥과 게으름을 통해 마음과 가까워지는 시간으로, 나로 놓일 수 있는 몇 없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나의 마음과 그리 친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라고 말할 때의 그 ‘마음’이 바로 내 것임에도, 마음과 나의 결속은 자주 와해되고 흐려지는 속성의 것이었다. 지난 5년 동안 나는 자살 고위험군 환자로 분류되는 깊은 우울증을 지나왔다. 과거의 시간을 ‘지나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기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실패가 있었다. 내게 여행은 도망을 택함으로 나를 구조해 내고, 마음을 느끼는 것으로 존재를 인식하는 하나의 생존 수단이었다. □은 그 시간을 누구보다 잘 이해해 내는 친구이다. □이 보낸 편지에 수북하게 담긴 것은 빈번한 실패 속에서 낙담하는 나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깃털 같은 위로들이었다.
9월 한 달 동안 베를린으로 투어를 가게 된 □에게 오래전 편지에 대한 답장을 쥐여주고 싶었는데 좀처럼 편지를 쓸 무드가 안 되었다. 머지않아 나는 답장 대신 내가 여행지에서 시간을 보내온 방법을 담은 하루짜리 가이드북을 선물하기로 마음먹었다. 힘든 시간은 충분히 나누었으니 이제 반짝거리는 시간을 더 나누고 싶었다. 최근 유럽 물가가 잘 가늠되지 않지만 망설임 없이 하루를 보내기에 넉넉한 용돈도 같이 넣어 주기로 했다. 그 시간에 함께 할 수는 없지만 □이 나에게 이끌려 다니듯 나의 즐거움을 따라가 보면 좋겠다고, 그게 아니더라도 낯선 시간 속에서 이따금 작은 감각들을 입체적으로 느끼는 순간을 만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늘 하루는 내가 책임질게!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완성된 이 평범한 가이드는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또렷하게 남아있는 여행 중의 즐거운 순간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60유로 사용법
- 편안한 신발을 신을 것
- 따뜻하게 입을 것
- 전체 루트를 미리 계획하지 않을 것
조금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선다.
지도에서 가까운 강가를 찾아 강이 있는 방향으로 걷는다.
가는 길에 문 연 카페가 있다면 크루아상 하나와 따뜻한 카푸치노 한 잔을 산다.
비가 오는 날이 아니라면 야외 테이블에서 먹거나 걸어가면서 먹는다.
근처에 공원이나 강가 근처에서 먹어도 좋다.
새가 보이면 빵 부스러기를 조금 떼어준다.
TIP! 야외 테이블에서 먹을 경우 주인이 보지 않을 때 은밀하게 주는 것이 포인트강에 도착하면 빵과 커피를 사고 남은 잔돈 중 동전 하나를 꺼내어 손에 쥐고 소원을 빈 후 강에 던진다.
오늘 하루를 무사히 보내길 빌어도 좋고 다른 소원을 빌어도 좋다.
잠시 강을 감상한다.
TIP! 만약 주변에 강이 없거나 너무 멀다면 호수나 분수, 작은 물웅덩이 혹은 노숙인의 손안에, 그나마도 찾을 수 없으면 아무 데나 던진다.
지도에서 가까운 영화관을 찾는다.
가장 가까운 시간에 상영하는 독일어 영화를 관람한다.
지도에서 가까운 베트남 쌀국수 가게를 찾는다.
국물이 있는 국수를 고른다.
팁을 평소보다 넉넉하게 준다.
레드 벨벳 앨범을 들으며 목적지 없이 골목을 구불구불 걷는다.
지금부터는 지도를 보지 않는다.
서점, 속옷 가게, 문신 가게, 미용실, 식료품 상점 등 상점이 보이면 들어간다.
평소라면 지나칠 것 같은 가게에도 방문한다.
들어가기 망설여지는 상점이라면 더더욱.
상점에서 떠오르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를 위한 물건을 산다.
자신을 위한 것이어도 좋다.
혹은 자신을 위한 서비스를 받아도 좋다.
마트나 식료품 상점, 백화점이 보이면 가장 낯선 음식 하나와 가장 웃기게 생긴 공산품 초콜릿 혹은 젤리 하나를 산다.
TIP! 피로를 느끼면 가까운 4, 5성급 호텔을 검색해 로비로 들어간다.
로비에서 앉아 호텔 투숙객처럼 쉰다. 화장실이 열려 있으면 화장실도 이용한다.
직원이 의심스러워하거나 말을 걸면 호텔 내에 카페가 있는지 물어보고 즉시 자리를 떠난다.
“무스타파 야채 케밥”을 찾아가 줄을 선다.
예상보다 훨씬 오래 기다리게 될지도 모르니 마음을 단단히 먹는다.
되너를 포장해서 집에 와서 먹는다.
침대에 걸터앉아서 먹길 추천하지만, 오염이 걱정되면 소파나 의자에서 먹어도 좋다.
남은 돈을 봉투에 넣어 캐리어 안쪽 깊숙이 넣어둔다.
봉투는 완전히 잊어버릴 때까지 열어보지 않는다.
- 기록 방식은 자유. 무리하게 기록하려고 하지 않는다.
(예: 사진, 메모, 지도 혹은 마음에 드는 리뷰의 캡처 혹은 실패와 변수, 변심 사유 등)
- 모든 사항을 충실히 따를 필요는 없다. 실패, 변수, 변심 환영.
- 망설임 없는 하루가 되길.
- 그리고 행운이 따르길.
60유로 사용법에 대한 답장은 60유로 (안)사용 보고서로 돌아왔다. 실패, 변수, 변심 환영이라는 덧붙임에 응답하듯 □은 미션에 실패했다고 걱정스럽게 말했다. □에게 미리 알리지 않았지만, 단 한 가지 실패하지 않길 바랐던 미션은 바로 되너 먹기였다. □이 유일하게 성공했다고 의기양양하게 밝힌 그 되너 먹기! 그 이유는 아래 사진 속에 있다.

우리가 다른 시간 속에서 함께 먹은 되너.
□은 내가 준 60유로를 고스란히 들고 돌아왔다. 이 실패가 반가운 이유는 이제 □의 마음 한편에 언제고 실행해야 할 즐거움이 예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60유로짜리 하루라 이름 붙여진, 이 평범한 하루가 우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깃털 같은 시간이 되길, 열린 시간의 경험을 통해 우리 자신을 조금 더 긍정할 수 있길 바란다.
송민정 @serioushunger
나는 삶을 구성하는 불균형하고 미시적인 힘의 형태들을 탐구하고 이를 분위기로 압축된 인상의 덩어리로 옮긴다. 대개 느낌이나 기류처럼 정서적으로 감지되는 감각을 쫓아 미세한 진동을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