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누리 — 바젤 청첩장 프로젝트
아무래도 크리스마스 캐럴이 들릴 즈음이면, 어쩔 도리 없이 이미 지나가 버린 올해의 시간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연말은 저에게 참회의 시간이기도 해서, 매번 피하고만 싶습니다. 하지만 시간을 피할 수는 없는 일이니, 캐럴을 들으며 올해 있었던 일들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한 개인이 바꿀 수 있는 변화 중 가장 큰 변화는 장소의 변화가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몸의 위치를 바꾸면, 같은 장면에서도 전혀 다른 걸 보기도 하니까요. 저는 올해 서울에서 스위스 바젤로 천천히 옮겨왔습니다. 바젤은 서울처럼 화려하고, 복잡한 도시는 아닙니다. 오히려 단조로워 보일 만큼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도시처럼 느껴집니다. 올해 서울과 바젤을 오가면서 여러 프로젝트에 참여했지만, 그중 가장 특이한 프로젝트로 남아있는 것은 청첩장입니다. 이걸 프로젝트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요.
시작은 단순했습니다. 저와 제 파트너는 바젤에서 길을 걷다가 귀엽게 생긴 원목 3단 서랍장을 발견했습니다. 스위스는 모든 것이 비싼 나라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버릴 것이 있으면 길거리에 놔두곤 합니다. 그럼, 주변 이웃 중 그 물건이 필요한 사람이 자유롭게 가져갑니다.
서랍장 위에는 알파벳이 잔뜩 적혀있는 여러 종이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그게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활자가 연속적으로 인쇄된 종이들이 귀여워서 집에 가지고 오고 나서야 그것들이 레트라셋(Lettraset)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레트라셋은 미리 인쇄된 글자나 기호를 시트에 붙여두고, 원하는 위치에 올려 문지르면 시트에 붙어있던 잉크가 종이 위에 남는 타이포그래피 도구입니다. 지금처럼 편하게 인디자인이나 일러스트레이터에서 활자를 옮겨보며 디자인할 수 없었던 때에 사용하던 물건입니다.
레트라셋을 줍고 나니 이걸 이용해서 무언가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청첩장을 만들기도 해야 해서, 그럼 이걸 이용해서 청첩장을 만들자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이제는 종이가 필요합니다. 제 파트너는 예전부터 봐둔 곳이 있다면서 저를 바젤에 있는 종이박물관(Basler Papiermühle)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중세에 제지 공장이 있던 건물을 활용한 박물관인데, 입구부터 물레방아가 돌아가고 있는 독특한 곳입니다. 종이 박물관 1층에는 종이 상점이 있는데, 이곳에서 상점 직원분들과의 치열한 토론 끝에 손에 잡으면 도톰하면서 표면은 약간 우둘투둘한 종이를 골랐습니다.

종이를 구매하고 나니, 이제 제작의 시간입니다. 레트라셋은 쉽게 수정할 수도, 삭제할 수도 없는 방식이기 때문에, 한 장 한 장 신중하게 배치를 생각해 내야만 합니다. 심지어는 똑같이 만들려고 해도 미묘하게 빗나가는 각도와 위치 때문에 도저히 같아지지 않습니다. 한장 한장 배치에 집중하다 보면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몇 개쯤 완성해 놓고 다시 바라보며 어느 배치가 더 아름다워 보이는지 이야기하다 또다시 만들기에 집중하곤 했습니다.

한 개의 선을 긋고 나면 그다음에서야 어느 크기의 네모를 종이 위에 올릴지, 또 어디에 올릴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네모를 붙이고 나면 그다음은 무엇을 어디에 붙이는 게 좋을지 가늠해 봅니다. 하나는 다른 하나를 부르고, 다른 하나는 그다음을 부르는 식입니다. 일종의 도미노처럼 종이 위에서의 첫 번째 선택이 연쇄적인 결과를 불러옵니다. 가장 어려운 부분은 어느 타이밍에 멈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레트라셋 용지에는 아직도 많은 선과 네모와 원이 남아있기에, 자꾸 종이를 더 채우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적절한 순간에 멈춰야 합니다. 그래야 더 아름다워 보일 뿐만 아니라, 또 다음 장을 만들 수 있는 체력과 의지가 남으니까요.
또 흥미로운 점은 즉흥적으로 만드는 것 같지만, 그 안에서 디자인 단계가 생긴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일단 선 하나로 시작한 청첩장은 네모들로만 이루어진 청첩장과는 필연적으로 다른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선 하나로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그다음 네모가 등장한다면 이는 선으로만 이루어진 청첩장과는 또 다른 길을 가게 됩니다. 조형들의 배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종이의 정중앙에서 수직적으로 시작했다면, 이다음은 이 수직을 따라 다른 것들을 더하는 방향으로 갈지, 아니면 수평적인 것을 추가해 긴장을 만들어낼지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의 선택을 더 해가다 보면, 조형적인 관점에서 카테고리를 가지고 이미지들을 분류할 수 있게 됩니다.

종이 위에서 고심하며 하나씩 선택하다보니 어쩌면 공간을 만드는 일도 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어느 한 선택이 다른 선택을 부르고, 그 다른 선택이 또 다른선택을 만든다는 점에서요. 그리고 디자이너인 저도 끝나기 전까지는 과연 어떤 모습이 될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점에서도요.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이제는 청첩장 종이 위의 네모 하나가 전시 디자인에서 제가 고려하는 작품의 위치처럼 느껴지고, 선과 네모가 조합된 청첩장 종이는 평면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백여 개의 청첩장을 이렇게 손으로 만들고 보니 이제는 이걸 하나의 프로젝트라고 불러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전시를 만들고, 공간을 만드는 일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어느 정도의 우연과 그 우연을 하나의 물질로 만들어내려는 의지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매일매일의 노동까지. 우연히 발견한 레트라셋에서 출발한 청첩장 만들기 여정은 어쩌면 디자인이라는, 너무나 방대해서 정확하게 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이 행위를 잘 설명해 줄 수도 있겠다고요.
이누리 @nuryylee
전시 디자이너/공간 디자이너. 서울과 바젤을 오가며 살고, 일하고 있다. 최근에는 경기도미술관 <작은 것으로부터>, 국립현대미술관 <아가몬 대백과: 외부 유출본>, 누르 리야드 2025 <Ayoung Kim: Time Arcs> 등을 디자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