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뚜기 — INFP 인플루언서의 기쁨과 슬픔

우뚜기 — INFP 인플루언서의 기쁨과 슬픔

국립중앙박물관 서화실의 오랜 개편이 끝나가던 얼마 전, 공개일을 하루 앞서 전시를 보며 학예사님의 설명을 들을 수 있는 귀한 자리에 초대받았다. 그날은 주4일 근무자인 나의 휴무일이고, 긴 시간 많은 공을 들였다는 새 서화실 공간이 궁금했고, 이촌동의 명물 게살 오믈렛도 먹고싶었던지라, 메세지를 본 즉시 참석하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뒤늦게 인지한 그 자리의 이름은 ‘인플루언서 데이’. 혹시 현장에서 라방을 해야 하는건 아닐까,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지만) 공개한 적 없던 내 얼굴이 드러나는게 아닐까, 갑자기 일정이 생겼다고 할까, 인플루언서가 아니라서 못간다고 할까, 머릿속이 아득해지며 여러 걱정이 솟아났지만 그 걱정들을 매일 내일로 미루는 사이 어느새 ‘인플루언서 데이’가 다가왔고, 나는 속절없이 그 곳에 가게되었다.


세심하게 개편된 서화실은 작품 선정, 공간 구성, 조명, 텍스트, 어느 하나 빠짐없이 훌륭했고 흥미로웠다. 운영자님의 환대와 학예사님의 상세하고 깊이있는 작품 설명이 끝나자 참여자들의 자기소개 시간이 시작되었다. 미술이나 문화와 관련된 컨텐츠를 운영하는 분들이 자신의 채널을 소개하고 오늘의 소감을 나누고 교류하는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나는 불혹이 훌쩍 지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초등학교때 그랬던 것처럼,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바로 어제도 그랬던 것처럼, 쭈뼛거리며 아주 짧은 소개를 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무도 별 관심 갖지 않으셨을텐데도 모두를 실망시켰다는 혼자만의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한번은 너무나 근사한 잡지에서 평소 동경해 왔던 에디터님이 인터뷰 제안을 주셨다. 원하는 장소와 멋진 헤메스도 제공해 주신다는 에디터님께 나는 혹시 멀리서 뒷모습을 찍어도 되겠냐는 부탁을 했다. 패션지 입장에서는 다소 황당했을 부탁을 에디터님은 너그러이 들어주셨고, 나는 얼굴 대신 국립현대미술관 뒷골목에서 조선김밥을 바라보는 등짝으로 출연하게 되었다. 나름의 스토리를 담아 “친구가 샤르자 비엔날레 앞 노점에서 사다준 셔츠와 바지”를 입고갔으나 어쩐지 부끄러워 말하지 못했지만, 술을 한 잔 곁들인 인터뷰를 하고 난 뒤, 나는 에디터님을 집에 초대하기에 이른다. 

그렇다. 나는 무척 내향적이면서도 다른 이들을 엄청나게 사랑하고, 부끄러움이 많으면서도 호기심 또한 그 못지않은 INFP인 동시에, 어쩌다 6만 6천여 분의 감사한 팔로어를 모시게 된 (마이크로) 인플루언서였던 것이다.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 사이에서 어떤 날은 부끄러움이 호기심을 이겨 집에 머물고, 어떤 날은 몇 년 전 다정한 댓글을 달아주셨던 작가님의 전시를 보기 위하여 월차와 장거리 운전도 불사하는 복합적인 존재가 되어버렸다. 


‘마른 비만’이나 ‘웃프다’처럼 서로 반대되는 의미를 가진 단어를 결합한 말들이 있다. 그 반대되는 정도가 클 수록 단어의 힘은 강해진다. 학교에서는 ‘소리없는 아우성’이나 ‘찬란한 슬픔’과 같은 서로 먼 말의 결합이 문장에 역설적 아름다움을 더해준다고 배웠다. 그렇다면 혹시 ‘INFP 인플루언서’인 나도 그런 강력함, 혹은 역설미, 혹은 갭모에라도 갖게 될 수 있을까. 박물관 서화실을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렇게 말할 걸…’ 머릿 속으로만 계속 다시 생각해 본 자기소개를 이 자리를 빌어 꺼내본다. 



나는 인스타그램에서 전시와 근처 맛집을 소개해는 계정 oottoogi를 운영하고 있다. 2017년부터 오늘까지 1929개의 게시물을 올렸으니, 9년간 이틀에 하나 꼴로 전시와 근처 맛집을 소개한 셈이다. 전시를 보는 것은 나의 취미이자 특기다. 전시를 보는 것이 취미라면 취미지 어떻게 특기까지 될 수 있을까 싶지만, 흥미로운 전시들의 여닫는 일정을 체크하여 가장 많은 전시를 볼 수 있는 교집합을 택일하고, 오르내리막길과 버스 환승 시간을 고려하여 효율적인 동선을 짜고, 중간 중간 힘을 낼 수 있도록 근처 맛집을 배치하고, 시간이 허락하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해서 전시를 보며, 무척 바쁜 때에도 점심 시간을 아껴 회사 근처 전시를 체크하는 것에 9년째 지치지 않고 있다는 면에서 특기라면 특기일 수 있을 것이다. 

여덟 군데 정도 지원했던 수시 모집에서 오직 미술 대학 한 곳에만 합격하고, 그리하여 미술 대학을 나오고, 미술 이론 대학원에 들어가고, 현재 다니는 일터를 제외하고는 모두 미술과 관련된 직장에 다녔으니 전시보기가 취미인 것은 당연한가도 싶지만, 나는 그보다 훨씬 어릴적부터, 미술학원 부설 유치원에 다니던 때 부터, 외숙모의 친구분께서 미술 작가이신 바람에 함께 인사동에 드나들던 때부터 미술 전시회를 보러 다녔다. 어쩌면 전시를 찾아다니다보니 미술 대학에 가고 관련된 직장에 다니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전시를 보다 효율적인 동선으로 관람하고, 근처에서 맛있는 것을 먹고, 이를 남에게까지 권하게 된 것은 첫 직장 <월간미술> 덕분이다. 매일 곳곳을 돌아다니며 전시를 보고 취재를 하는 것이 업이었던 선배들에게서는 전시 동선과 중간의 식사 장소가 막힘없이 술술 나왔다. 사회 초년생이었던 나는 어떻게 저렇게 한번에 지도가 그려지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 곳에서 2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면서 나도 언제부턴가 머릿속에 전시 관람을 위한 동선을 그리며, 이왕 나간 김에 근처에서 무슨 맛있는 것을 먹어볼까를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오늘은 무슨 전시를 보았고, 근처에서 무엇을 먹었다”를 기록하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시작했다. 가끔은 전시의 한 부분과 연관이 있는 맛집을 소개하며 나름의 말장난을 하기도 했다. 이 계정은 스무 명 남짓의 내 친구들이 전시+밥정보를 위해 활용하던 중 한 작가의 (당시)트위터 홍보에 힘입어 팔로어가 크게 늘었고(그날 나는 계정이 해킹당한 줄 알았다), 9년의 시간이 흘러 현재는 감사하게도 6만 분이 넘는 뚜기님들과 함께하고 있다. 


세상에 이렇게 할 말이 많았는데(사실 더 있는데), 그날은 “안녕하세요 우뚜기라고 합니다” 라고 말하고 도망쳤다니… 


그러나 그 자리에서 이 말을 다 했다면 아마 똑같이, 혹은 더 크게 후회했을 것 같다. 평소였다면 이불 속에서 되뇌였을 뒤늦은 자기소개를 이렇게까지 길게 들어주신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리며, 앞으로 더욱 더 열심히 좋은 전시를 찾아보고, 직접 보러 가실 마음이 드시게끔 잘 소개하고, 이왕 가신 김에 근처에서 즐길 만한 맛있는 것들을 소개해 드려야 하겠다고 다짐해 본다.


우뚜기 10주년을 맞으면 로고를 디자인해 주신 콘탁트와 함께 스티커라도 제작해 볼까 한다. 언젠가 카페에서 누군가의 컴퓨터에 녹색 동그라미 스티커가 붙어있는 것을 발견한다면, 너무 너무 기쁠 같다. 그러나 때도 아마 감사한 분께 그사람이 바로 저라고 말씀드리지는 못할 같다.


로고(by kontaakt) 옛날 로고(kontaakt 비공식 작업)

 

우뚜기 @oottoogi

2017년부터 인스타그램에서 전시와 근처 맛집을 소개해는 계정 oottoogi를 운영하고 있다. 2026년 4월 11일 기준 총 1929개의 게시물을 올렸으니, 9년간 이틀에 하나 꼴로 전시와 근처 맛집을 소개한 셈이다. 자신을 우뚝이 오뚝이 오뚜기 오또기 등으로 부르시는 분들을 만나면 정정하고 싶은 마음이 솟아나지만, 불러주시는 게 어디냐 싶어 이내 그 마음을 접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