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시우 — 상봉 카르텔: 이길 수 없다면 합류하라

정시우 — 상봉 카르텔: 이길 수 없다면 합류하라

“저희는 오늘 2016년 2월 5일을 기하여 지난 17개월간의 미술계 생활을 마감하고 대한민국의 평범한 동호인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은퇴 기자회견을 참조해 《헤드론 저장소》(교역소, 2016)의 클로징 파티에서 진행된 교역 종료 기자회견은 ‘본인들을 서태지와 같은 위치에 놓는 것이냐’라는 조롱에도 불구하고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으며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교역소 Trading Post>는 2014년 서울 중랑구 봉우재로 103(이제는 사라진 이 주소는 현재 서울시 청년안심주택이 지어지고 있다)의 자전거 가게 2층 창고에 기생하며 간헐적으로 문을 열던 무슨 공간이었다. 누군가는 이 이름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수탈의 역사나 제국주의 식민지의 어두운 이면을 연상하기도 했지만, 우리는 즐겨 하던 보드게임(TCG)의 카드 이름에서 유래한 이 시공간이 당대의 상태를 교류하는 장소였음에 의미를 두고 싶다. 


교역 종료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몇몇 기관과 연구자들은 그때의 활동을 아카이브라는 이름으로 수집하려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교역소는 판매되지 못하고 이삿짐 사이에서 우연히 발견된 로고 스티커 뭉치처럼 털어내지 못한 악성 재고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2024년 교역소, 더 나아가서는 신생공간의 묵은 짐들을 처분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구상했다. 이 과정에서 가장 경계한 것은 미술계에서 통용되는 10주년 기념 전시의 통상적인 문법이었는데, 아카이브 기록물을 나열하는 진중함이나, 과거를 신화화하는 전형적인 방식만큼은 최대한 비켜서고 싶었다. 


대신 성수동의 팝업 스토어나 편집숍들이 철 지난 상품을 ‘아카이브 세일(Archive sale)’이나 ‘프롬 더 볼트(From the Vault)’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새로운 활력을 얻는 방식에 착안했다. 《Trading Post》(가제)는 10주년 기념전이 아니라, 주관적 기억을 파는 재고 처리 팝업이었다.


기획의 핵심은 외부의 비판적 시선을 전유하여 이벤트의 활력으로 치환하는 데 있었다. 교역소로 활동하던 당시, 신생공간을 향해 쏟아지던 ‘친목질’, ‘폐쇄적인 집단’, 혹은 ‘카르텔’이라는 냉소적인 수사를 반박하거나 회피하는 대신, 이를 역설적인 브랜드로 재맥락화하고자 했다.


 이렇게 탄생한 브랜드 <상봉 카르텔 SANGBONG CARTEL>의 톤앤매너를 완성한 것은 기획서에 첨부한 조악한 시뮬레이션 이미지들이었다. 당시 기술적으로 불완전했던 초기 생성형 AI가 뱉어낸, 매끄럽지만 어딘가 기괴한 도상을 그대로 사용했고, 이것은 실체 없이 부풀려진 카르텔이라는 허상을 시각화하기에 적절한, 기묘한 불협화음이었다.

“이길 수 없다면 합류하라(If you can’t beat them, join them).”


리버풀의 원더보이 마이클 오언이 라이벌 맨유로 이적하며 남긴, 수많은 콥(The Kop)들을 자극했던 이 말처럼 우리는 우리를 향한 비판에 올라타기로 했다. 


그 결과, 참여자를 이 수상한 카르텔에 편입시키는 형식의 이벤트가 준비되었다. 전시를 위해 제작된 매대에서 퍼포머와 관객이 1:1로 마주 앉는다. 숨 막히는 침묵과 응시. 퍼포먼스 특유의 예술적 엄숙함을 차용하지만 그 끝에 펼쳐지는 것은 리오넬 메시의 입단식이나 국가 주도의 요식행위에서 발견되는 과장된 축제적 해프닝이다. 

참여자는 입단 계약서에 서명하고, SANGBONG CARTEL이 적힌 티셔츠를 지급받는다. 가벼운 서약이지만, 이 행위를 통해 관객은 외부의 비판자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유니폼을 입은 식구가 된다.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가변형 모듈로 구성된 전시장은 지난 10년의 희비극적 연표로 브랜드의 헤리티지를 보충하고, 당시의 공간을 채웠던 음악들을 재구성한 플레이리스트가 재생되면, 아카이브 세일이라는 이름의 악성 재고 처리가 완료된다.

하지만 이 기획은 (당연하게도) 지원사업 선정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좌초되었다. 상봉 카르텔 티셔츠는 단 한 장도 제작되지 못했고, 재고를 처리할 동력 역시 얻지 못했다.


미술계는 여전히 신생공간을 미술사나 사회현상, 혹은 세대론의 언어로 분류하고 정의한다. 현재에 이르러서는 미술시장의 가시적인 성과에 가려, 더 이상 신생공간을 조명하는 시도도 손에 꼽을 정도이다. 하지만 나는 단 1회 개최된 《굿-즈》(세종문화회관, 2015)를 끝으로(혹은 새로운 기점으로) 신생공간이라는 물리적 시공은 닫혔을지언정, 그 에너지가 퍼폼, 팩, 취미관, 더스크랩 등의 파생 활동으로 끈질기게 이어졌음을 기억한다.


전시는 무산되었지만, 뒤풀이 장소로 점찍어두었던 충무로의 그린호프는 여전히 성업 중이다. 단지 나와 연식이 같다는 이유로 결정했던 이 오래된 호프집에서 겉바속촉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치킨을 먹으며 교역소와 신생공간의 10주년을 자축한다. 


비록 티셔츠는 없지만 여전히 이삿짐 어딘가에 존재할 상봉 카르텔을 위하여.


따라서 교역소는 해체가 아닌 작별을 하는 것입니다. 교역소는 우리 각자의 마음에서 하나일 것이며 참여자들의 기억 속에서도 하나로 남을 것입니다.”  

 

정시우 @seeyou_seawoo

정시우는 서울 외곽에 위치했던 공간 교역소(2014–2016)를 공동 운영했으며 플랫폼엘, 부산비엔날레, 현대자동차 제로원(ZER01NE)을 거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학예연구사로 일하며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운영을 맡았고, 《그리드 아일랜드》(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2022)를 담당했다. 《폴리곤 플래시》(인사미술공간, 2018), 《굿-즈》(세종문화회관, 2015) 기획에 참여했으며 디지털 환경에서 이미지 생산과 소비에 관심을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