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티 — 나는 바젤도 처음이고 부스걸도 처음이라네
서울에 위치한 ‘샤워’라는 갤러리에서 부스걸로 일했다. 샤워는 리스테 아트페어에 참여했는데, 메인인 아트 바젤보다 신진 작가 위주인 독립 페어다. 작품을 팔아야 하는 입장도 처음이고 갤러리 소속으로 아트페어에서 일해 본 적도 없어서 주변 ‘숙련된’ 갤러리스트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아래는 그렇게 모은 몇 가지의 주옥 같은 조언을 토대로 일주일의 여정을 전한다.
1. 어른 기저귀라도 찰 것
내가 받은 첫 조언은 어른 기저귀를 챙기라는 것이었다. 물론 농담이지만 아트페어는 그만큼 부스에 언제, 누가 올지 모르기 때문에 자리를 비울 수 없다는 것. 점심을 먹을 시간도, 화장실을 다녀올 시간도 없을 정도로 치열하다는 걸 보여준다. 월요일은 아트 바젤의 본 페어가 오픈하기 전이라 리스테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날이다.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같은 말을 반복하다 보니 나중에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지경.


2. 다리가 아파도 파티를 다닐 것
8시에 페어가 끝나고 바젤 소셜클럽을 갔다. 소셜클럽은 거대한 오피스 빌딩을 빌려 공간 곳곳에서 작품과 공연을 볼 수 있는 또 다른 위성 페어/전시장이자 파티 공간이었는데 그 규모와 취향이 어마어마하다. 주차장부터 전시가 이어지며 “너 지금 일해야 되는 거 아냐? Shouldn’t you be working?” 이라는 문구가 보인다. 보톡스를 놔 주고 하이힐에 술을 따라 먹여 주는 부스가 있다고 했는데 보진 못했다. 참신하고 재밌었다. 워낙 방대한 데다 핸드폰까지 안 터져서 한 40분간 길을 잃어 나오는데 한참 걸렸다.

3. 혼자 구석에서 노래를 듣고 올 것
첫날 부스를 방문한 갤러리스트가 해준 인상 깊었던 조언은 가끔 구석에 가서 혼자 노래를 듣고 오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작품만 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에너지까지 함께 가져가니, 오래 버티려면 무엇보다 내 기운부터 관리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좀 귀담아 들을걸. 하루쯤 지나자 배터리가 고갈된 듯 눈 밑 그림자가 짙어졌고 누구에게도 감추지 못했다.
4. 온 도시가 전시장
바젤에서는 쿤스트뮤지엄이나 쿤스트할레, 바이엘러 같은 미술관만 전시장인 것은 아니다. 누군가의 집, 공항, 다리, 골목, 심지어 H&M 옆에 있는 쇼윈도에서도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바이엘러 파운데이션 미술관

쿤스트뮤지엄에서의 조식
5. 의상을 신중히 정할 것
부스에 찾아온 지인이 진지한 조언을 건넸다.
"내일 뭐 입을지 팀원들이랑 미리 상의해."
이유를 묻자 본인의 웃픈 일화를 들려줬다. 갤러리 단톡방에 매일 다음 날 입을 옷을 올리다가 딱 하루 "설마 겹치겠어?" 하고 건너뛰었더니, 다음 날 팀원과 검은 재킷, 핀스트라이프 셔츠, 남색 바지, 검정 로퍼까지 완벽한 커플룩이 되어 아직도 그 수치심을 잊지 못한다고.
옷이 정말 중요한가 보다. 스타일 좋은 일본인 디렉터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주머니가 많은 옷을 입을 것. 명함을 생각보다 많이 주고받기 때문이다. 옷은 세련되게 입되 사람들이 작업보다 옷만 기억하게 만들지는 말 것. 패션은 어디까지나 조연이고 주연은 작품이 되어야 하니까???

(이탈리아 갤러리와 계속 데일리룩이 겹침)
6. 큰거 모아 놓은 페어, 언리미티드
아트 바젤의 ‘언리미티드’ 섹션은 큰 작업과 설치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 부스 규모 때문에 아트 바젤에서는 보여줄 수 없었던 대형 설치 작업들을 공개하는 자리기도 하다. 원래는 아트 바젤에 부스가 있는 갤러리들만 참여할 수 있었고 그마저도 부스에 작품 딱 하나만 전시할 수 있는 조건이었는데, 올해부터 이 제약이 완화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페어에서도 시장과 경제 분위기를 의식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7. 페어에서 만난 사람들: 금괴 아저씨와 맛집 아저씨
밖에 앉아 있다가 어떤 아저씨를 만났다. 작가인지, 컬렉터인지, 큐레이터인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바젤 주민이라는 그는 디지털 금융 시스템을 믿지 않아 현금만 쓰고, 전 재산을 금과 은에 투자했다고 했다. 아트 바젤 입장권이 없다길래 하나 드렸더니 다음 날 까치처럼(?) 스위스 골드 딜러의 명함을 가져왔다. "이번 주까지만 특가야." 역시 세일즈는 데드라인을 만드는 일인가 보다.
또 다른 바젤 토박이는 전혀 다른 선물을 줬다. 바젤에서 가장 맛있는 식당 세 곳만 추천해달라고 했더니 포스트잇까지 빌려가며 "조금 더 생각해보고 올게"라고 말했다. 그리고 10분 뒤 정말로 다시 돌아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세 곳을 정성스럽게 적어 건네주고 갔다.
8. 백조와 함께 수영을 해볼 것
갤러리스트인 배우자가 16년동안 페어를 오가면서도 한번도 수영을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우리는 팅겔리 뮤지엄 앞에서 방수 가방에 타월, 핸드폰, 신발을 담고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아침에 툴툴 대다가 막상 물에 들어가니 아이처럼 좋아해서 어이없었음. 생각보다(?) 깨끗하고(?) 차가웠던 강에는 백조와 아기 오리들이 헤엄친다. 강의 흐름으로 인해 가만히 있으면 그대로 떠내려간다. 다음에는 아쿠아슈즈를 챙겨와야지. 일이 끝나고 치킨 버거를 사서 또 강가로 향했다. 짙은 노을이 수면을 붉게 물들였다. ㅎㅈ은 속옷을 입은 채로 위에 수영복을 입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9. 씨앗을 심을 것
쓰다 보니 정작 미술 이야기는 별로 없는 것 같다. 정작 메인 페어인 아트 바젤에 대한 얘기도. 온 곳이 예술이니 오히려 작품 바깥의 것들이 더 보였다.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관심 없는 사람의 시간을 잠시 빌려 보기. 무관심에서 오는 머쓱함을 견디기. 돌이켜보면 가장 많이 얻은 건 명함도 판매도 아니라 사람들이 툭 던져 준 지혜였을지도. 오늘 당장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도 어떤 만남은 훗날 뜻밖의 기회가 될 수 있으니, 씨앗을 심는 마음을 잊지 않기로!!!

케이티 @ilovektlee
케이티는 얼마 전 서울에서 파리로 이사를 왔다. 미술의 안팎의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