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락티(박지민) — 내가 예술에 대해 뭘 안다고 

크락티(박지민) — 내가 예술에 대해 뭘 안다고 

인정하기 슬프고 부끄럽지만 나는 늘 예술가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그게 어떤 예술인지는 크게 상관이 없었다. 시각예술이든 음악이든 무용이든 내가 가진 것을 섬세히 갈고닦아 창작하고 그것을 누군가 앞에서 수행하며 타인의 삶과 무의식에 스며드는 사람이고 싶었다.


비평은 곧 하나의 예술 형태라고 믿었던 오스카 와일드나, 자기 삶과 세상을 의식적으로 형성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예술가라고 주장한 요셉 보이스의 말을 확장한다면 지금 이런 끄적임도 예술이라고 우겨볼 수 있겠으나 나는 여전히 물질로, 소리로, 움직임으로 남는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보여주는 예술가를 선망했다. 그러나 그런 예술에는 놀랍도록 아무런 재능이 없었다. 재능이 없다는 걸 아주 일찍이 알았기에 막연한 가능성에 기대어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아도 되었던 건 어쩌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줄곧 예술가가 아닌 ‘미술사학도’로, ‘예술계 종사자’로 공부하고 일하며, 한 번도 직접 창작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은 나를 자주 위축시켰다. 특히 작가의 손과 재료와의 씨름을 읽어내는 일이 핵심이 되는 작업 앞에서는 여전히 자신이 없다. 암만 애써 들여다봐도 어딘가 계속 흐릿한, 마치 투명도 50%의 필터를 통해 바라보는 듯한 한계를 느낀다.


예술가의 고충이나 작업 과정을 온전히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나는 왜 이토록 그들에게 끌리는 것일까. 직접 만난 작가들, 그리고 작품을 통해 간접적으로 만나는 작가들 속에서 나는 대체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이를 정리해 보면 내가 생각하는 예술의 본질도 함께 드러날 것 같았기에 언젠가는 이에 대해 꼭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은 내가 좋아하는 예술가들에게서 공통으로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이다.

 

첫째, 그들은 결과를 서두르지 않고 시간을 들여 인내하는 사람들이다. 내가 아는 예술가들은 어떤 주제에 사로잡히면 그 주변을 오래 맴돈다. 수십 년을 같은 질문에 바치거나, 현장 한가운데에 직접 몸을 담그기도 하며, 때로는 전문가들을 집요하게 찾아가 묻고 듣고 배우기도 한다. 당장 형태를 갖춘 작품이나 돈으로 환원되지 않더라도 질문을 붙들고 끝내 풀어내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예컨대 미국 초기 한인 이주민의 삶을 되짚는 작업을 지속해 온 김성환 작가는 이를 위해 서부를 직접 운전해 초기 정착지들을 찾아다니거나 하와이로 기반을 옮겨 과거의 흔적을 그러모았다. 시간에 쫓기는 배달기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상 설치 〈딜리버리 댄서의 구〉를 세계 곳곳에서 선보여온 김아영은 이를 위해 실제 여성 배달 라이더들을 집요하게 인터뷰하고, 어느 날엔 오토바이 뒷좌석에 올라 서울을 함께 달리기도 했다. 투자한 시간만큼의 성과가 곧바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구불구불 돌아가는 리서치의 시간을 기꺼이 감내하는 태도는 각자가 붙들고 있는 질문이 분명 의미 있다는 자기 확신에서 나올 테다.

 

 

둘째, 그들은 원하는 바가 분명하고 고집도 세지만, 동시에 자신과 전혀 다른 타인의 삶의 방식에도 열려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이 두 명제가 양립한다는 것이 늘 신기했다. 그건 이들이 인류애가 넘치는 평화주의자라서라기보다는 (굳이 따지자면 내가 좋아하는 예술가들은 사람들이 잊거나 묻어둔 문제를 기어이 다시 끄집어내 질문하는 쌈닭에 더 가깝다) 작업을 통해 인간의 불완전함을 이해하려 하기 때문이다.


모순과 결핍을 쉽게 단죄하지 않고 판단을 유예하는 태도에는 타인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자신 역시 완전하지 않다는 인정이 담겨 있다. 자신의 윤리적 기준에 어긋나는 누군가의 실수를 보고도 ‘그럴 수도 있겠구나’하고 쉽게 재단하지 않는 태도. 그런 태도를 지닌 예술가들을 보며, 나는 종종 섣부르게 단죄해온 과정 속에서 내가 놓친 것들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Felix Gonzalez-Torres: Always to Return》 전시 전경.

Smithsonian’s National Portrait Gallery, 2024. 필자 촬영

 

셋째, 그들은 자신의 취약함을, 혹은 너무 못나고 불온해서 감추고 싶을 법한 면모들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사람들이다. 관객에게 가위를 건네고 자신의 옷을 원하는 만큼 잘라가도록 기꺼이 몸을 내어주는 오노 요코의 퍼포먼스, 관객이 사탕을 자유롭게 가져가도록 허용하며 점점 줄어드는 무게로 쇠약해지는 몸을 은유하는 펠릭스-곤잘레스 토레스의 설치 작업, 추락하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가도 다시 일어나 걷는 자신의 아바타를 전면에 내세우는 마틴 심스의 영상. 이들의 작업에서 일관되게 발견되는 것은 약점을 드러내되 그것을 자기연민으로 소비하지 않는 태도다. ‘내가 이만큼 힘들었다’는 과장된 서사도, 고통을 극복한 강한 자아를 과시하는 장면도 없이 외로움과 상실을 견뎌온 방식을 담담히 보여준다. 그런 솔직함은 나에게 늘 근거 있는 용기를 준다.

 

Martine Syms, 〈DED〉, 2021

Museum Brandhorst, 2026. 필자 촬영

 

넷째, 그들은 스스로 예술가이면서도 다른 예술가들을 아이처럼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이는 역사 속 미술가들을 공부하며 알게 된 사실이자 활발히 활동하는 작가들을 직접 만나면서 더 선명하게 느낀 바이다. 어떤 이는 비슷한 재료와 기법을 빌려 예술적 영웅에게 오마주를 헌정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전혀 다른 형식과 메시지의 작업을 하면서도 그저 순수하게 동료 작가의 작품 앞에서 눈을 반짝이며 감탄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창작 행위를 사랑한다는 뜻이자 동시에 나 아닌 상대방의 시간과 노력을 존중한다는 의미이다.


결과를 당장 약속받지 못해도 집요하게 연구하는 사람, 단단하면서도 열려 있는 사람, 취약함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거기에 잠식되지 않는 사람, 타인의 창작을 진심으로 기뻐할 줄 아는 사람. 나는 예술가가 되진 못했지만 이런 이유들로 예술가들을 여전히 흠모하고 있다.

 

 

크락티(박지민) @smjmp

직접 다녀온 전시를 소개하기 위해 시작했지만, 플랫폼의 한계를 체감하며 정체성이 점차 모호해지고 있는 인스타그램 계정 크락티(@crakti)를 운영한다. 현재 뉴욕에서 미술사와 미술 비평을 공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