뭎 — 정처 잃은 발걸음들의 방 02

뭎 — 정처 잃은 발걸음들의 방 02

도멘 꼼뜨 조르쥬 드 보귀에 샹볼 뮈지니 프리미에 크뤼 2005 빈티지. 100만 원 가까이 하는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 와인이다. 이걸 얼마에 샀더라?

 

 

소믈리에 나이프의 컷팅 칼로 호일을 한 바퀴 빠르게 도려내 뜯어내고, 스크류를 코르크 한가운데에서 2밀리미터 정도 옆으로 조준한 다음, 살살 돌려 집어넣은 뒤, 다시 코르크를 천천히 뽑아 올려 왼손으로 코르크를 움켜쥔 채 끝부분을 살살 비틀어 빼냈다. 병 입구를 수건으로 한번 닦아준 다음, 테이스팅 잔에 와인을 조금 부은 채로 호흡을 가다듬고 천천히 스월링을 한두 번 한 후 코에 갖다 대고 향을 맡은 순간, 별안간 불이 켜지지 않는 깜깜한 방에 들어온 것 같았다.


암순응조차 불가능하며, 동공을 키우고 눈을 다시 크게 부릅떠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음영의 깊이를 절대로 알 수 없고 빛의 기미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진정한 어둠 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등에 식은땀이 흐르고 눈앞이 아득했다.


와인은 피어나야 한다. 어떤 와인이건 이 점에 대해서는 예외가 없으며, 오픈되어 산소와 만나는 시작점부터 몇 분, 몇 시간, 며칠, 길게는 몇 달까지도 시간에 따라 어느 방향으로건 점점 변화하며 정점을 향해 달려간다. 하지만 좀 전에 오픈한 와인은 오픈 직후부터 아무런 변화도 없이 시간을 붙잡아두고 있었다.


흐르지 않는 시간은 영원 같다고, 영원은 무한한 시간이 아니라 붙잡힌 시간이라는 것. 사실상 우리가 실제로는 느낄 수 없는 시간이 거기에 있었고, 그러니까 이런 것이야말로 진짜 어둠이라고 생각했다.


가끔 이런 와인들이 있다. 말하자면 명상하는 와인들(요가와 명상이 시간을 없애려 노력하는 거라면, 와인을 마신다는 건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보통은 와인이 자는 중이라고도 하는데, 하긴 뭐 자는 것과 명상하는 것이 누군가에겐 비슷할 수도 있으니까. 자는 와인을 깨워보려고 노력해(최적의 환경을 만들어 어르고 달래) 볼 수는 있지만, 그 역시 늘 불확실한 어둠에 가려져 있다.


와인이 잠에서 깨어나는 건, 순전히 와인의 마음과 컨디션에 달려 있으므로 우리의 예측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저 꼼짝없이 그런 어둠에 순응하고 받아들이는 방법만이, 여러모로 보나 어둠 속에서 (와인이) 다음 입구를 찾도록 안내하는 단서가 되지 않을까?


어둠은 남색이나 검은색이 아니다. 어둠은 색깔이 아니며, 시각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공간적인 것이다.이다. 와인은 점점 어둠에서 밝음으로 이동할 것이고, 우리는 그 사이에서 늘 길을 잃고 방황할 것이므로, 만약 어딘가에 들어왔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출구를 찾는 대신 다음 입구를 찾아야 할 것이다.

 

 

뭎 @_mu_p_

퍼포먼스의 속성과 연결되는 형식적 고민으로부터 현실과 끊임없이 충돌할 수밖에 없는 가상의 시뮬레이션을 실행하며, 소외되고 배제되며 계속해서 방향을 잃어버리는 가장자리의 감수성을 촘촘하게 조직된 시간과 공간으로 풀어낸다. 2 콜렉티브로 활동하면서 엠유피 건축사사무소, (bar) 버틀러와포스터를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