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락티(박지민) — 어느 쓸모없는 논문에 대하여
지난가을 우리 가족은 강아지 두부의 장례를 치렀다. 늙고 앙상한 몸에 민들레 홀씨처럼 위태롭게 붙어있던 털 한 움큼을 잘라 서랍장에 넣어두었다. 요즘 반려동물을 떠나보내는 많은 이들이 곧 사라질 몸의 조각을 이렇게 간직한다고 한다.
이후 가끔 서랍장을 열어 그 털을 꺼내볼 때마다, 비록 두부의 생전 모습을 온전히 재현하지는 못할지라도 사진이나 영상으로는 담을 수 없는 어떤 존재의 무게를 품고 있음을 실감했다.

죽은 이의 흔적을 간직하려는 풍습은 훨씬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육신이 스러진 뒤에도 오랜 세월 보존되는 머리카락은 예로부터 망자의 자리를 대신하는 조각이 되어주었다. 19세기 유럽에서는 세상을 떠난 가족이나 연인의 머리카락을 작은 반지나 펜던트에 넣어 몸에 지니는 문화가 유행하기도 했다.
나는 인간의 이런 면모가 참 애틋하고 귀엽다고 생각했다. 종교는 육신을 초월한 내세를 약속하고, 철학은 몸과 분리된 영혼의 불멸을 이야기하며, 문학은 죽음 너머에서도 사랑이 지속된다고 노래하지만, 막상 눈앞의 상실과 마주하면 우리는 얼마나 그 육신을 붙들고 싶어 하는가. 우리는 직접 보고 만질 수 있는 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웠던 적이 없다.

그 무렵 나는 하이디 부허(Heidi Bucher, 1926~1993), 레베카 혼(Rebecca Horn, 1944~2024), 김수자(1957~) 세 여성 작가의 작업을 주제로 졸업 논문과 전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 세 작가를 선택한 동기는 거창한 학문적 문제의식보다도 그저 이들의 작업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주변으로부터 논문 쓰는 과정이 얼마나 길고 고된지 여러 번 들었기에 이왕이면 내가 깊이 애정하는 작가들을 연구해야 그 시간을 기꺼이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뚜렷한 방향성이나 예견된 결론 없이 도록과 인터뷰, 연구 자료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나의 시선은 자연스레 이들을 관통하는 공통의 맥락으로 향했다. 더 정확히는 이 셋을 나란히 놓았을 때 개별적으로는 보이지 않던 무언가가 드러나는지 궁금했다.

가부장적 권위가 깃든 아버지의 서재부터 여성들이 수용되었던 정신병원과 감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공간의 벽과 바닥에 라텍스를 바른 뒤 그것을 통째로 벗겨내는 하이디 부허의 ‘스키닝(skinning)’ 작업. 자신의 팔 끝이나 머리, 상체에 구조물을 덧붙인 채 낯선 감각으로 공간을 탐색하는 레베카 혼의 퍼포먼스. 그리고 수십 년 동안 모은 자신의 머리카락과 입국 심사 과정에서 채취된 지문을 사람 크기로 확대해 인쇄하는 김수자의 판화.
이 세 갈래의 여정을 오래 들여다보며 나는 이들이 공유하는 하나의 초점을 발견했다. 이들은 모두 피부가 하는 일에, 피부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피부는 역설적인 장소다. 몸의 가장 바깥에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가장 내밀한 지점이며, 나와 타인이 처음 만나는 경계이자 정체성이 가시화되는 곳이다. 그 표면 위에서 우리의 몸은 분류되고 통제되며, 욕망의 대상이 되거나 상처의 흔적을 떠안기도 한다.
세 작가가 왜 하필 이 표면에 주목했는지, 그리고 이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살펴보는 것이 내 논문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를 위해 나는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디디에 앙지외(Didier Anzieu)의 '피부-자아' 개념을 경유했다. 앙지외는 저서 『피부-자아(Le Moi-peau)』(1985)에서 자아가 피부를 통해 형성된다고 보았다. 우리는 누군가의 피부를 만지고, 또 누군가가 나를 만지는 경험을 통해 비로소 자신과 세계를 구분하며 관계 맺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나는 세 작가가 앙지외가 설명한 피부-자아의 기능들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시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피부가 자아의 테두리이자 세계와의 경계라면, 그 경계가 느슨해지거나 흔들릴 때 과연 무엇이 가능해지는지 들여다보고 싶었다.

백 페이지에 달하는 논문의 세세한 내용을 다 옮길 수는 없지만, 연구의 핵심 결론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내가 세 작가의 작업에서 발견한 공통점은 이들이 모두 피부를 고정된 경계가 아닌 끊임없이 벗겨지고, 이동하며, 변형되는 것으로 바라보았다는 점이다. 이들은 모두 그 불안정함에서 역설적으로 어떤 가능성을 읽어낸 듯했다.
하이디 부허에게 억압적인 공간의 표면을 벗겨내는 행위는 그 공간에 새겨진 기억이 다른 방식으로 다시 살아나게 하는 계기였고, 레베카 혼에게 신체를 확장해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일은 타자의 경험을 상상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한편 김수자에게 지문과 머리카락이라는 고유한 식별 흔적을 거대하게 만들어 익명화하는 과정은, 정체성을 규정하고 격리하던 통제의 표면을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보편적 신체의 조건으로 환원하는 시도였다.
세 작가는 모두 피부, 곧 자아의 경계를 느슨하게 열어젖힘으로써 그 틈새로 다른 존재와 연결되는 새로운 가능성을 우리 앞에 펼쳐 보이고 있었다. 나는 이들이 주어진 피부를 이탈하고 공유하며 다르게 살아내는 법을,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와 타자, 나아가 비인간 존재를 아우르는 세계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상상하는 법을 제안하고 있음을 밝혀내는 것으로 연구를 매듭지었다.
학기 초, 연구 제안서를 쓰며 지도교수에게 아무래도 내 연구는 별 쓸모가 없는 것 같다고 솔직히 털어놓은 적이 있다. 수십 년 동안 학계에 몸담아온 교수는 웃으며 자신 역시 그렇다고 답했다. 본인이 인류에 가장 직접적으로 기여하는 순간은 그저 가끔 지하철에서 길을 묻는 행인에게 방향을 알려줄 때뿐이라며, 그러니 당장 연구의 효용을 증명하려 애쓰기보다 그저 하고 싶은 연구에 집중하라고 나를 다독였다.
교수의 말대로 이 논문이 인류의 진보에 당장 어떠한 기여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다만 이들의 작업을 들여다보며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몸의 경계와 흔적의 의미를 조금 더 깊이 사유하게 되었으니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길고도 괴로웠으나)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논문의 결론을 마무리 짓는 동안 나는 서랍장 속 두부의 털을 자주 떠올렸다. 육신이 사라진 뒤에도 남는 것들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붙들거나 놓아주어야 하는지 고민하는 일이 결국 이 논문의 주제와 그리 멀지 않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물론 앞으로는 내 연구가 이렇게 지극히 개인적인 깨달음에만 머물지 않기를 바라지만, 내 노력이 그 이상의 효용을 증명하는 날이 언제 올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때까지는 지하철에서 길을 잃은 이들에게 성실히 방향을 알려주며 나의 몫을 다하고 있을 테다.
크락티(박지민) @crakti @smjmp
직접 다녀온 전시를 소개하기 위해 시작했지만, 플랫폼의 한계를 체감하며 정체성이 점차 모호해지고 있는 인스타그램 계정 크락티(@crakti)를 운영한다. 현재 뉴욕에서 미술사와 미술 비평을 공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