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정 ─ 원하고 원망하죠
수신: Sue Choi
참조: ca-va.life
제목: 원하고 원망하죠
본문:
안녕하세요,
지난 통화에 이어 짧게 제 생각을 이메일로 적어 전달해 드려 봅니다.
며칠 전에 일본 뮤지션 Gliiico의 매니저를 만났어요. 지난해 DMZ피스트레인뮤직페스티벌 출연 이후 처음으로 다시 만난 거였는데 오랜만에 보니 꽤 기분이 좋아 보였어요. 근황을 물으니 자신 있는 목소리로 그러더라고요. 트와이스의 멤버 채영의 솔로 앨범에 참여했다고요. 과연, 타이틀곡부터 앨범 전체에 흐르는 무드가 Gliiico 스타일이더군요. 9월 1일 이후 채영과 함께 찍은 사진과 뮤직비디오의 인스타그램 포스트에는 수만 개의 ‘좋아요’가 찍혀 있었습니다. 훌륭한 콜라보레이션이라고 생각해요. Gliiico만이 풍기는, 패션잡지의 모델다운 인디팝의 아우라가 채영에게 멋진 옷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음반이 발매되자, 거기에 참여한 다른 뮤지션의 포스팅이 눈에 띄었습니다. 수민과 Y2K92의 지빈이요. 둘 다 Gliiico만큼 패셔너블하고 독특하면서 독립적인 음악 세계를 보여주는 뮤지션이에요. Gliiico와 다른 점은 K-pop 아이돌의 음악에 참여한 게 처음이 아니라 종종 있는 일이란 겁니다.
아무튼, 독립 아티스트들이 모인 신에서는 꽤 화제가 될 법한 채영의 이번 신보를 들으니 몇 년 전 RM의 1집 솔로 앨범이 기억났습니다. 전 세계 톱 그룹 BTS의 멤버인 RM이 좋아하는 (그리고 아마 존경하는) 아티스트와 협력한 트랙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 쟁쟁한 이름 안에 '김사월'이 있었어요. 한국의 포크 신, 인디 신이 놀랄만한 사건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하건대, 이날 이후 우리는 김사월이 스타가 될 줄 알았어요. 그러나 하루아침에 BTS의 팬들이 모두 김사월을 팔로우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더라고요. 김사월에게 저 일은 하나의 포트폴리오로 작용했을 뿐, 음악가로서의 커리어는 아직까지도 점진적입니다. 문득, 오늘 Melon에서 채영의 앨범을 검색해 봤어요. 피처링에 Gliiico라는 이름이 있었고, 크레딧에도 Gliiico의 페이지가 링크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들어가 봤죠. 팬 수는 아직 16명이더라고요. 채영은 1만 3천 명인데. 발매 후 며칠 안 되긴 했지만, 조금 실망한 게 사실입니다. 한국에서, 일본에서, 세계에서 Gliiico의 음악적, 미적 감각에 더 주목해 주면 좋겠거든요.
생각해 보니, 주변에서 비주얼 아트에 관련된 젊은 창작자와 예술가, 디자이너들도 K-pop 음반 기획에 심심찮게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픽 디자인, 영상, 미술, 의상 등등 그들이 가지고 있는 독특하고 멋진 스타일이 K-pop의 예산, 인력, 시간과 붙으니 결과물은 더욱 빛이 나는 것 같았어요. "OOO의 XXX에 WWW로 참여했습니다." 같은 문구와 영문 크레딧, 태그가 달린 인스타그램 포스트는 언제나 희망과 기대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이 협력은 훌륭한 외주이자 포트폴리오의 일부로 종료되는 것 같습니다. 창작의 주체로서 대가와 크레딧을 갖지만, 주인공은 되지 못하기 때문일 거예요. 우리의 세계에서는 유일무이한 색을 가진 창작자이지만, 대형 자본이 만든 시스템 속에서는 주인공을 구성하는 일부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일부가 실제로는 작품의 핵심을 만들어낸 것이라 하더라도요.
참고로, 이 현상을 두고 가치 판단을 내리려는 건 아닙니다. 21세기 예술계와 연예계와 음악계는 이미 저런 방식의 네트워크와 협업으로 구성되어 있으니까요. 스포트라이트를 한 번에 받는 메이저 신에서 아무도 보지 않는 언더그라운드의 보석에 기회를 주고 가치를 인정해 주는 모습. 독창적인 재능을 좋은 보수와 환경에서 마음껏 발휘할 기회를 가지게 되는 것. 메이저는 마이너를 원하고, 마이너는 메이저를 꿈꿀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한국의 음악계를 이끄는 궁극적 미감은 자본의 끝판왕인 K-POP과 을지로스럽고 연희동스러우며 한남동 같으면서도 성수동 같은 젋은 대중예술인들이 만나는 지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서로 원하고 원망하며 붙어있는 동전의 양면인 겁니다.
하여간, 짧은 가을 만끽하시고 다음에 또 뵙기를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수정 드림
이수정 @chechii
DMZ 피스트레인 뮤직 페스티벌 예술감독이자 뮤직&컬처 에이전시 ALPS 이사로 재직하며 한국과 해외를 잇는 음악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운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