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 ─ 내일도 후회하겠지, 어제도 말을 너무 많이 했다는 생각에

정용 ─ 내일도 후회하겠지, 어제도 말을 너무 많이 했다는 생각에

요근래 항상 그랬듯, 무심코 스마트폰 화면을 스와이프하다가, ‘나’로 점철된 셀프 프로모션 어쩌구 포스팅을 보았다. 익숙한 템플릿과 욕망을 얼기설기 엮어, 어떤 배움이란 식으로 포장하려 하지만 결국 ‘나 님’에 대한 인정 욕구를 발산할 뿐인, 공연음란죄가 죄라면, 대충 이런 류의 거대한 인정욕구 발산 포스팅 또한 죄로 여겨 어디다 갔다 처넣어야 하는 것 아닌가!란 익숙한 사고 흐름을 따라 소름 끼쳐 하다가, 아차! 싶어 여지껏 썼던 무언가들을 죄다 지웠다. 5분 전의 일이다. 그래서 괜히, 아주 딴 이야기를 해보도록 한다.


영화 <대부>는 돈 콜리오네의 딸, 코니의 결혼식으로 시작한다. 이탈리아 이민자들의 결혼 형식을 성대하게 내미는 이 영화는, 동시에 미국으로 이민 온 마피아가 미국에서 일을 처리하는 방식을 교차하여 보여 준다. <대부>는 이탈리아 이민자 사회가 쥐고 있는 의식(儀式)-형식을 내밀어 특수성을 부각시킴으로써 성립이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이 영화는 이탈리아계 미국인들이 미국 사회에서 가족이란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가부장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룰을 강제할 수밖에 없다는 듯 바라본다. 마피아 조직 간의 충돌도 이탈리아 이민자 공동체를 유사 가족으로 다루고 관리할 수 있는 가부장을 선출하기 위한 의례 중 하나이다. 룰을 유지-관리하는 행위들이 축적되면 형식이 자태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때 콜리오네의 마피아는 전통을 정처럼 다루며 새 땅에서 모습을 드러낸 형식을 조형해 나간다. 이로써 이탈리아계 가족이라는 최소한의 공동체에서 미국 사회 구성 요소로 자리 잡는 과정으로 까지 확장되어 특수성을 확보한다. 이 특수성이 <대부>라는 영화의 형식을 성립시키고, 신화의 일종으로 밀어붙일 수 있게끔 한다. 극 중 이탈리아 이민자 사회가 촉발하는 폭력은 미국에 편입되기 위한 형식이기 때문에. 그때 그들에게 허락된 자리란 그런 것이었다.


또 다른 이민자들이 있다. 최양일 감독의 <피와 뼈>는 일본 안의 재일교포 사회의 특수성으로 성립된다. 이 영화는 패밀리 비즈니스를 다룬 <대부>와 달리 김준평에 집중하는 꼴을 하고 있다. 김준평에게 가족이란, 번식 행위를 통해 발생한 관계일 뿐이다. 그 관계로 인해 파생된 혈육은 재산 축적을 위해 최적화된 도구다. 가족을 꾸리는 데 실패한 김준평은 오사카에 적응하는 데는 성공한다. 제주도에서 오사카로 피난 온 이들에게 전통은 그저 습속에 지나지 않는다. 낯선 땅에서 익숙한 음식을 어떻게든 만들어 먹기 좋은 관계, 그래서 모여 살 수 있는 최소한의 구실, 김준평의 번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본래의 위상을 얻지 못한 전통은 편의에 따라 형태를 마구잡이로 바꿀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김준평의 집은 허구헌 날 개박살 나고, 뜯어 고쳐지며, 김준평을 위해 최적화되어 나간다. 공동체 의식이 결여된 개개인들은 안전망 없이 요동치는 역사 안에서, 나름의 선택 같은 것을 하지만, 그 선택은 짐승 같은 김준평처럼 외부 환경에 대한 반사 작용일 뿐이다. 그래서 덜컥 일본 군으로 입대하거나, 일본에서 다시 북한으로 대규모 이주 하거나, 도피성 결혼 등을 하며 휩쓸려 나간다. 김준평의 돈과 여자에 대한 집착은 전통적인 형태의 가부장의 자리에 올라서겠다는 염원이었겠으나, 그가 그것을 달성해 갈수록 노쇠해져 가고, 그가 쥐고 있는 폭력의 위상이 쇠락해 갈수록, 그와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혈육에 의해, 그가 가족 안에 자리 잡을 곳은 없다며 밀려 나간다. 이때 습속은 전통의 태를 드러내는 것처럼 군다. 하지만 김준평을 몰아낸 그들의 자리란, 끝내 일본 사회에 편입하지 못한 김준평이 꾸려 놓은 것이고, 그들은 그곳에서 소외된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면, 또 다른 이민자들이 있다. 이성진의 <성난 사람들> 속 이민자 2세들이다. 이 시리즈 속 동양인들은 온갖 방식으로 주류 백인이 꾸려 놓은 정상성에 본인을 구겨 넣으려고 고군분투하고 있다. 에이미 라우와 기타등등은 여피족처럼 굴며, ‘진짜 여피’ 족이 친구 삼고 싶은 아시안의 요소들로 집을 범벅을 해두고 있다. 데니 조와 떨거지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들이 벌이는 온갖 사고를 미국식 자기 계발로 포장하며 정상성을 탈취하기 위해 부던히 애쓰며, 그 노력의 잔해들로 자신들의 공간을 어지럽혀 놓고 있다. 그리고 이 시리즈는 아시안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형식으로 짜증을 들이민다. 이 짜증스러운 소수자들은 커뮤니티의 특수성 형성을 홀대한 대가로, 위대한 미국 선전의 최전선에 배치된 틀에 자신들을 짜맞추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내밀한 장소, 차 안이나 집안 구석, 창고 같은 곳에서 짜증이나 방출한다. 한국계 교회 커뮤니티의 자폐적 특성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을 둘러싼 외부? 환경에 적절히 배치될 규준을 개발하지 못한 이들의 정상성에 대한 집착은, 생존을 위한 습속 같은 것이 된다. 21세기 한국계, 중국계, 일본계 미국인의 허락된 자리란 그런 것인 모양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그런 자리가 그들만 그런 자리에 있는 것 아니란 생각이 엄습해 오고, 그러다 보면 또 스마트폰 화면이나 스와이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