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태용 — 초고급 바닐라
올더스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에서 묘사한 사회는 감정이 아니라 자극으로 통제된다.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아도 행복하지만, 대신 느끼는 법을 모른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사람들을 마비시켰던 그 약의 이름이 ‘콘텐츠’로 바뀌었을 뿐이다.
세상은 특이해지려는 욕망으로 과열돼 있다. 하지만 모두가 특이해지면, 아무도 특별하지 않다.

현시대의 창의성은 종종 ‘민트초코마라로제청양마요트러플두바이실비대파AI생성우유크림치즈뚱카롱’ 같은 조합에서 그친다. 그저 새롭다는 이유로 피로를 남긴다.
그 와중에 나는 맥도날드 소프트아이스크림이나 겨울날의 스타벅스 핫초콜릿, 던킨도너츠의 바바리안 크림 같은 걸 좋아한다. 누구나 먹어봤으며, 좋아했지만, 그 누구도 좋아한다고 말하지는 않는 것들 말이다.
수많은 시즈닝과 토핑 박람회 속 필요한 건, 특이하려고 호들갑 떨지 않는 바닐라의 미학이다.
바닐라는 모두가 아는 기본의 맛이다. 그 익숙함 속엔 감각의 기준이 있다. 너무 멀어질수록, 우리는 개인의 내적 질서를 잃는다. 바닐라는 평범함의 상징이지만, 동시에 세계를 정렬시키는 중심축이다. 그건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감각의 좌표이자 태도의 최소 단위다.

Rei Harakami의 『opa*q』는 그러한 바닐라의 최고급 형태다. 이 앨범은 전자음악의 정교함과 인간적 감수성의 균형점 위에 있다. 전자음을 인간의 체온으로 번역하고, 반복의 구조 안에서 감정의 미세한 진폭을 남긴다. 당시 일본 전자음악이 색채와 캐릭터성으로 과열되거나, 앰비언트가 무표정한 자연으로 도피하던 시기에 그는 두 극단을 모두 껴안았다.
기계의 리듬 안에서 인간적인 서정을, 센티멘털한 파동 안에서 논리의 정돈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opa*q는 인위와 자연, 구조와 여백이 공존하는 음악이다. 즉, 아무런 과시 없이 완성된, 초고급 바닐라의 사운드다.
‘고급’이라는 단어는 흔히 가격이나 희소성으로 평가되지만, 사실 ‘세련(洗鍊)’의 개념에 더 가깝다. 씻을 세, 단련할 련. 불필요한 것을 씻어내고 남은 핵심을 다듬는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고급은 화려함의 결과가 아니라 절제의 산물이다. ‘초고급’이란 결국 더 많은 것을 쌓는 일이 아니라, 얼마나 잘 덜어낼 수 있는가의 문제다. 세련됨은 덜어내는 기술이고, 그 덜어냄의 끝에 바로 ‘초고급 바닐라'가 있다.
Nokia Medallion (2003)
Issey Miyake ROBODEX2000 (2000)
Honda e
KEF Mu7 (2022)
요즘의 세련됨은 쇠맛으로 통용된다. 세련되려면 금속성, 차가움, 반짝임이 있어야 한다는 게 공식이다. 세련의 본뜻은 ‘가늘게 다듬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금속은 세련됨을 표현하기에 좋은 재료일 수 있다. 단단하고, 미세하며, 연마의 흔적이 남으니까. 그러나 그 본질은 반짝임이 아니라 날카로움과 섬세함에 있다. 빛이 아니라, 그 빛을 받아내는 구조의 정밀함에 있다.

지금의 쇠맛 열풍은 이 과정을 오해하고 있다. 날카롭고 섬세하다기보다, 뭉툭하고 묵직하다. 연마된 검의 맛이 아니라, 오함마 맛이다. 역설적으로 가장 투박하고 촌스러운 결과물이다.
Coperni Black Tailored Blazer (2022)
세련됨은 태도에서 감각으로, 감각에서 다시 태도로 되돌아오는 순환이다. 그 순환이 끊긴 이 시대에는 감각만이 남아있다. 그래서 모두가 반짝이지만, 아무도 반사하지 않는다. 결국 이렇게 쇠맛은 새로운 두바이우유크림이 되어버렸다.
물리학에는 F=ma라는 단순한 공식이 있다. 힘은 질량과 가속도의 곱이라는 뜻이다. 이 공식을 형이상학적인 문화의 영역으로 옮기면 이렇게 읽을 수 있다.
F는 영향력,
m은 변하지 않는 기준,
a는 시대에 맞춰 변화하는 가속도.
오늘날의 문제는 모두가 a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 빨라지려 하고, 더 앞서 보이려 한다.
그 태도는 대개 두 가지 얼굴로 나타난다. 현시점 가장 잘 먹히는 코드를 찾아 헤매는 트렌드 미어캣이나, 대다수의 소비자보다 먼저 해외 문물을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어깨가 높아진 느그동네 사카모토 류마의 모습으로 말이다.
유유백서 74화 『승패의 갈림길!!』 中
전자는 무리에서 뒤처질까 봐 가속하고, 후자는 타인을 앞섰다는 우월감을 향해 가속한다. 서로의 입자는 다르지만, 기준 없이 속도만 키운다는 점에서 그 파동은 같다. 선진화되어 보이고, 특이해 보이는 것들을 덕지덕지 붙이다 보면
키메라몬
결국 남는 것은 키메라몬이다. 각각의 파츠는 최신일지 몰라도, 전체로서 무엇이 되려는지 알 수 없다. 질량 없는 가속은 실질적인 힘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오늘날의 엔진은 자주 버티지 못한다.
휘황찬란한 시즈닝과 토핑 전쟁 속에서 불안감에 AI 토핑이나 하라주쿠 시즈닝을 한 번쯤 더 뿌리고 싶어지는 마음은 이해한다.

하지만 그 토핑이 나의 바닐라와 맞지 않는 조합이라면, 과감히 거르고 나만의 바닐라빈을 갖추는 편이 낫다.

스트리밍 구독료보다 노이즈 캔슬링 비용이 더 커진 2020년대에, 나는 묵묵히 바닐라빈을 긁어모으는 몇 해를 보내려 한다.

마라로제송태용이 되고 싶진 않다.
결국, 나는 바닐라다.
송태용 @wwwcy4nwww
창작을 ‘제도’가 아닌 ‘게임’으로 바라보는 기획자. 내러티브를 입힌 공간과 제품, 먹는 전시와 입는 언어를 만들어왔고, 예술과 기술 사이의 비가역적인 혼합을 탐구한다.
RPG 코스튬샵 KIZIP, 글로벌 아트 커뮤니티 갤러리 워터마크, ’Edible Idea‘라는 슬로건으로 운영중인 브레드 읍읍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