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영 ─ 이것과 이것

정우영 ─ 이것과 이것

낭만과 전망

 

바벨을 잡았다 놓았다. 그룹 PT의 유일한 참가자인 날이 종종 있다. 선생님과 교대로 바벨을 들었다. 그가 드물게 대화를 시도하는 날이기도 했다. 여름휴가로 오사카에 갈지, 후쿠오카에 갈지 고민하고 있었다. 가벼운 조언을 했다. “일본 되게 잘 아시네요? 많이 가보셨어요? 일본 가면 뭐 하세요?” 나는 내 유난이 대체로 민망하다. 잠시 주춤하고 말했다.

“바이닐을 사요. 그래서 레코드숍을 많이 다녔죠.” “엘피 들으세요? 저도 진짜 듣고 싶은데. 와, 낭만. 저도 낭만 진짜 좋아하거든요.” 바벨은 다시 잡을 수 있었고, 낭만은 잡을 수 없었다.

낭만은 한국에서 다르고, 지금 세대에게 또 다르다. 한국에서는 ‘Roman’의 문맥이 삭제됐다는 점에서, 지금 세대에게는 낭비를 감당하는 모든 서사와 기호가 낭만이라는 점에서. 10년 전의 낭만이 아니다. 그때 낭만은 주로 현재 시점에서 과거를 미화하는 경향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바이닐은 낭만에 속하지만, 그때는 추억, 지금은 낭비를 감수하는 태도가 지배적이다. 해가 갈수록 바이닐 판매량에서 10대와 20대의 비중이 증가한다. 낭비를 긍정한다.

타고난 배경을, 합리로 무장한 조직을, 편마암처럼 버틴 제도를 극복하는 서사를 좀처럼 보지 못한 세대다. 모든 세대의 도약은 이전 세대에 대한 거부였고, 지금 세대 역시 다르지 않았지만 사회적 파급력 차원에서 ‘특정 집단의 이해’를 벗어날 수 없었다. 지금 세대에게 혁명은 스마트폰의 홈 버튼처럼 낯선 단어다. 마크 피셔는 청년 문화가 록에서 힙합으로 옮겨간 현상을, “청년문화가 뭔가를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는 ‘순진한’ 희망”이 “야만적이고 환원주의적인 판본의 ‘현실’을 냉정하게 수용하는 것으로 대체”된 것이라 설명한다. 지금 세대의 낭만은 지극한 현실주의자들의 꿈이다. 하지만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꿈이야말로 물건을 펼칠 좌판이다. 기업은 당신의 꿈이, 성장 서사가, ‘추구미’가 얼마나 돈이 되는지 잘 안다. 여러분의 꿈이 결코 이루어지지 않기를, 영원히 지연되기를 응원한다.

한편 전망은 꿈이 쾌락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예컨대 바이닐은 속임수가 불가능한 스튜디오의 시대를, 음악성에 기대던 한가한 마케팅의 시대를, 작품이라 부를 수 있었던 앨범의 시대를 상징한다. 어렵고 불편하고 힘들게 만들었고, 어렵고 불편하고 힘들게 들었다. 그 시간과 노력을 쏟은 힘으로 이 너머에 반드시 뭔가가 있을 거라는 믿음이 곧 전망이었다. 오직 끝까지 가보려는 사람만이 근처까지 간다. 단지 ‘노오력’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의 문화 소비는 왜 쾌락과 산업에 머무를 뿐 현실의 삶과 밀착하지 못하는가 하는 사회적 차원의 문제 제기기도 하다.

그는 나중에 독립하면 턴테이블을 살 거라고 그때 조언을 부탁한다 했다. 나는 바이닐 입문자를 위한 재수 없는 답변을 오래 전부터 준비했다. “아마존 가면 일체형 턴테이블 있어요. 금방 고장 날 확률이 높지만, 한 1~2년 계속 바이닐 사는지 지켜 보고 그때 다시 얘기해요.” 낭만으로 근육을 키울 수는 없다.

 

정우영 @youngmond

프리랜스 에디터. <Dazed & Confused Korea>와 <GQ Korea>에서 일했다. 서울 인기 페스티벌, 우주만물, 에코서울, 버드엑스비츠 등을 기획하고 운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