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미 — DJ의 이중 덕후 생활
취미로 디제이를 하고 있지만, 음악을 트는 공간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도 내 직업을 선뜻 밝힌 적은 거의 없다. 나는 고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만화·애니메이션을 전공했다. 디깅도 덕질이라면 덕질. ‘덕후’의 길은 그때부터 시작된 셈이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다름 아닌 ‘야한 만화’를 다루는 곳이었다. (후덜덜) 처음부터 성인 만화를 다룬 건 아니었다. 우리 회사는 게임과 일러스트를 중심으로 한 전문 출판사로, 국내외 아트북 및 관련 서적을 소개하거나 직접 제작했다.
마스다 미리의 <오늘도 상처받았나요?>
처음부터 성인 만화를 다룬 건 아니었다. 우리 회사는 게임과 일러스트를 중심으로 한 전문 출판사로, 국내외 아트북 및 관련 서적을 소개하거나 직접 제작했다.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덕후들 사이에서는 꽤 알려진 출판사다. (^^)V 대표적인 책으로는 《여신전생 페르소나 3, 4 공식 설정 자료집》이 있다!! (절판, 중고로도 구하기 힘듦)
‘완벽한 덕후’가 되기 위해 미소녀 일러스트북을 제작하고 싶었고, 그런 ‘미소녀·모에·동인’ 감성이 충만한 아티스트를 찾아 코믹월드를 자주 드나들었다. 밀리터리 책을 만들 때는 도쿄에서 열린 밀리터리 컨벤션을 찾아 다양한 장난감 모형 총을 쏴보기도 했다. 국내외 유명 코스프레어의 밀착 인터뷰와 포토 메시지를 아카이빙한 책도 만들었다. 코스프레를 하나의 컬처로 바라보며, 로리타와 라이트노벨, 의상 제작 튜토리얼 등을 함께 엮어 ‘덕력’을 한층 끌어올렸다. 그렇게 평화롭게 덕질을 이어가던 어느 날…
회사에서의 내 자리, 덕력 만렙을 찍던 시절.
대표님께서 미국으로 곧 떠나신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이태원에서 ‘미스틱’이란 클럽도 운영하셨는데, 출판사와 클럽 모두 정리하실 거라고 하셨다. 참 아쉬웠다. 회사가 문을 닫아서가 아니라, 일이 바빠 클럽을 한 번도 못 가본 게 너무 아쉬웠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대표님께 놀러 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회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손님으로 자주 찾아오셨던 다른 회사의 사장님께 인수되었다. 새로운 대표님은 이제 출판 대신 디지털 시대에 맞는 화끈한 사업을 할 거라고 했다. 바로 ‘성인 만화' 서비스를 말이다!! 그렇게 일본 만화 출판사와 계약을 맺고 작품을 한국어로 번역해 각종 온라인 플랫폼에 하나둘씩 올리기 시작했다. BL, 백합물, 할리퀸 등 장르를 가릴 것 없이 19금 딱지가 붙는 수많은 만화가 내 손을 거쳐 갔다. 대체로 모자이크 처리에 꽤 많은 시간이 들었다. 그보다 더 손이 많이 갔던 작업은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 들어가는 의성어를 다듬는 일이었다. (부///>.<///끄)
도쿄에서 본 캬바레 이벤트. 디즈니 풍 음악에 폴 댄스라니… 마치 놀이동산의 성인 버전 퍼레이드를 보는 듯했다.
성인 만화를 매일 보다 보니 어느덧 내게는 여느 책과 다를 바 없는 수면제가 되어버렸다. 특히 점심을 먹고 나면 그 효과는 더 확실해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눈을 번쩍 뜨게 만든 건 일본의 캬바쿠라(キャバクラ)나 스낵바, 속되게 말하자면 물장사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였다. 그 안에는 단순한 자극을 넘어 마음을 건드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곳의 여성들은 욕망의 대상이라기보다, 기댈 수 있는 존재에 가까워 보였다. 사회가 요구하는 남자로서의 책임을 잠시 내려놓고 애써 숨겨왔던 나약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그녀들이 바다처럼 크고 넓은 가슴으로 그들의 지친 마음을 어루만진달까? 성인 만화에 면역이 생긴 나를 깨운 건, 아이러니하게도 자극이 아니라 ‘위로’였다.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 있으면 다리가 저린다.
그렇게 성인의 세계(?)에 눈을 떴지만 다니던 회사가 여러 사정으로 문을 닫으면서 그 세계와도 자연스레 멀어졌다. 그런데 최근에 <용과 같이>라는 게임을 통해 그 세계를 또 다른 방식으로 즐기고 있다. “다메 다메~” OST로 잘 알려진 야쿠자 게임인데, 작년 12월에 플스5를 장만해 <용과 같이 7>으로 입문했다. 지금은 <용과 같이 8>을 깨는 중이다. 내 최애 게임은 <드래곤 퀘스트>와 <파이널 판타지> 같은 정통 RPG다. 그런데 <용과 같이 7>은 전사나 마법사, 요정 대신, 보통의 RPG에서는 보기 힘든 노숙자, 호스트, 마담 같은 직업들이 그 자리를 채운다. 직업만 바뀌었을 뿐인데 모험은 어느새 판타지가 아니라 생계와 체면, 관계와 사회 속에서 굴러가는 어른들의 이야기가 된다. 그 낯섦이 우습고, 또 묘하게 현실적이다.
무기도 범상치 않다. 호스트는 샴페인을 휘두르고, 노숙자는 비닐우산을, 마담은 핸드백을 들고 싸운다. 아이템을 얻기 위해 블랙잭, 포커, 마작까지 하나둘 배우다 보니 어른의 세계가 생각보다 꽤 재미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됐다. 어쩌면, 어른이 되길 잘한 것 같다.
<용과 같이 8>. 광어와 냉동 갈치가 무기다. 이걸로 맞으면 꽤 아프겠지?
미미 @mimi_yoo45
DJ는 취미. 국내외 게임 일러스트 및 아트북 등 관련 서적을 출판하고 성인 만화를 서비스하는 회사에서 편집부로 일한 적이 있다. 현재는 가업을 잇기 위해 수련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