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호정 — 전시보다 공간: 게임은 지속될 수 있을까?

허호정 — 전시보다 공간: 게임은 지속될 수 있을까?

게임의 규칙

미술관 맨바닥에 자기 안경을 벗어놓고는 사람들이 이를 어떻게 감상하는지 지켜보던 소년이 있었다. 작가의 (상징적) 서명이 붙은 잘 익은 바나나를 벽에서 떼어내 왕 삼켜버린 청년이 있었다. 

이들이 우선 도전하고 조롱하는 대상은 ‘전시 공간(혹은 화이트큐브)’의 엄숙주의로 보인다. 이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대상-사물이 전시장에 들어서면 돌연 맥락과 의미를 획득하는 상황을 견디지 못한다. 그리고 그러한 규범에 합의하고 따르는 일을 의심하며, 사람들을 그 의심에 가담케 한다.

하지만, ‘전시’라는 것이 애초에 그런 게임이 아니던가? 게임의 장르를 물을 순 있지만, 게임을 게임이게 만드는 토대를 부정하면 이야기는 멈춘다. 그러면, 게임은 게임이 아닌 게 되니까.

이 게임의 가장 기초적인 룰은, 전시라는 이름 아래 공간에 잠시 놓인 대상을 유심히 보(게 하)고, 거기서 뭔가 각별한 의미를 찾아내(게 하)며, 사유(케)한다는 것이다. 물론, 알다시피 게임의 종류는 워낙 다양하다(그 종류가 문제시될 수는 있다). 다뤄지는 대상은 물질이 아닐 수도 있고, ‘본다’는 행위로 양식화된 세칙은 다양하게 변주, 실험될 수 있으며, 그것은 시각 너머로 확장될 수 있고, 게임의 결과 얻어내는 ‘의미’들은 당연하게도 성취의 도식을 따르지 않을 수 있다. 게임이 개시되기에 앞서 룰에 대한 안내가 있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없는 경우도 있고, 게임 중에 제공되는 안내는 역시 제각각이며, 이 역시 부재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그럼에도, 게임은 게임인 이유로 지속된다. 

일단, 게임에 응하기로 한 사람들은 진지할 수밖에 없다. 게임 밖에서 보기에 한참 무의미해 보이는 것들이 게임 안에서는 또 다른 룰로 작동하니 말이다. 그리고 그 룰에 기꺼이 합의하고 참여한 이들에게는 게임을 구성하는 개별 요소 역시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된다. 여기서, 대체 그 게임은 왜 하느냐는 질문은 소용이 없다. 그 게임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조롱하던 안경 주인이나 바나나 도둑이 던진 의심도 (이 게임이 그 게임이 맞느냐 묻는 게 아니라면) 무효다. 왜냐면, 게임은 게임이고, 게임이 있으므로 게임을 하는 내가 있으며, 나는 게임에 응할 수밖에 없는… 그런 것이니까.

공간이라는 변수

요컨대, ‘전시’는 일정 기간 특정 장소를 점유하고 일어나는 사건으로, 유한성을 매개로 작품 또는 그와 비슷하게 역할하는 의미소를 (구체적으로) 작동시키는 (복잡한) 과정이다. 이때, 전시 만들기와 운영을 위한 모든 구간과 구성 요소는 ‘전시’라는 게임의 (오)작동을 발생시키는 데 결정적인 변인이 될 수 있다. 전시 공간, 전시 기간, 전시 기획, 작품(의 형식, 내용, 매체, 디스플레이 방식…), 공간 운영 방식(전시 개방 시간, 워크숍이나 프로그램의 운영…), 관객(의 연령, 젠더, 계급, 지역, 소속…), 전시 운영 주체(작가, 큐레이터, 공간 운영자, 행정가, 후원자…), 자본(의 출처, 운영방식, 수익구조…) 등.

그런데, 이 중에서도 ‘공간’은 자체로 전시-게임의 룰을 형상화하는 면이 있어서 가장 비중 있게 다뤄지곤 한다. 가령, 균질한 조명 아래 매끈하게 다듬어진 새하얀 벽이 사면을 채운, 고급 자재가 빛을 발하고 간혹 유명 건축가의 이름도 붙은 뮤지엄 공간을 떠올려보라. 여기서 공간은 그 자체로 ‘전시’가 된다(아무것도 없이 텅 빌 때도 그것은 작품이 되고 전시가 된다). ‘전시’의 스펙트럼은 따라서 공간에 의해 정해지는 것처럼도 보인다. 같은 이유로, 누군가는 전시-게임의 법칙을 가려두거나 적어도 덜 드러내기 위해, 부러 화이트큐브를 부정하며 폐허를 찾을 수도, 비-물질적인 (비)장소를 찾을 수도 있겠다. 

한편, 현실에서 ‘공간’은, 전시-게임의 작동을 좌지우지하는 복수의 변인이 혼재된 상태라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공간의 지리적 위치가 관객의 접근성을 결정하거나, 공간의 규모와 상태가 작품의 크기와 디스플레이 방식, 지속성 등을 결정하는 경우는 상당하다(그 역이 고려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더 결정적이다). 뿐만 아니라, 전시 운영 주체가 전시 공간의 소유자로서, 전시의 기간, 운영 시간, 작품의 선정과 전시 방식을 결정하는 경우도 많다. 

이 자체가 문제적이라기보다는, 그 결정권이 특정한 논리로 작동할 때, 그에 따라 게임을 지탱하는 근본적인 룰을 무효화할 때다. 게임의 룰이 무너지는 장면들, 게임의 외피를 두른 채 사실상 작동을 멈춘 장면들.


게임이 게임이 아닐 때

일테면, 공간 소유자이자 전시 운영자가 부동산 경제 논리를 우선시할 때, 거기 종속된 참여자들은 전시-게임의 행위자가 되지 못한다(집주인이라는 주님이여···). 단적인 예로, 전시 만들기에 소요되는 전체 예산에서 ⅓, 절반, 혹은 그 이상을 공간 대관료에 지불하는 일들이 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창작 활동 및 전시 운용에서 수행의 폭이 좁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 번 더 생각해 볼 부분은, 중앙정부나 지자체에서 후원하여 공적 자금으로 진행되는 다수의 창작 활동이, 기금의 소용을 증명하는 결과물로 전시를 열게 되어있다는 점이다. 이 경우, 지원금을 받은 작가 혹은 기획자는 전시 공간으로부터 ‘공간 사용 확인서’ 류의 증명서를 제출해야 한다. 이때의 ‘전시’는 앞서 우리가 살핀 바 기꺼이 참여하고 있는 바로 그 게임이 아니게 된다. 여기선 게임의 룰을 확인하고 합의하며 세부 행동 양식을 조율해 나가는, 긴밀하고 지난한 과정이 불필요하게 느껴진다. 다만, 창작물의 쇼케이스로서 단순 공간 대여가 필요할 뿐이다. 

그 이후 전개되는 일의 추이는 꽤 자연스러워 보인다. 전시-게임을 구성하던 요소들이 점차 고려 대상에서 밀려나거나 제외된다. 전시 기간은 수 주에서 수일로 줄어들고, 이는 공간을 제공하는 대관처의 일정과 가격(싯가) 제안에 맞춰지며, 관객은 다양화하기보다 협소해지고, 기획 없는 텅 빈 공간 안에서 작품은 한낱 오브제로 축소된다···.



게임은, 부지불식간에 나를 연루시켰다. 참여자이기도, 낙오자가 되기도 했던 전시-게임의 다양한 양상을 보는 일이, 지루할 때도 있지만 할 만한 일이라 여겨졌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그치만, (그) 게임이 (그) 게임이니까 거기 모여들고, (이) 게임을 (이) 게임이게 만들던 사람들이 드물어지는 듯한 인상도 받는다. 

결국 나는 계속 함께하자고 제안할 거다. ‘본다는 폭력성과 불가능을 견디고, 극복하게 하는 시간, 최소와 최대의 합의를 다투는 장소, 일시적인 공동체를 감각하는 사건을 지속하자고. 지금의 게임들이 뭔가 수상한 모양을 , 다시 룰로 돌아가고, 구간들을 매만져 보자고.

@hurhojung

큐레이터로 활동한다. 전시 공간 뮤지엄헤드(@museumhead_)에 기반을 두고 전시를 만들며, 전시의 공통감을 나누고자 동료들과 함께 플랫폼 엑시빗(@xhibitions.kr)을 운영한다. 말·글·이미지의 생산과 배포를 고민하고 개입하며, (비)정기 간행물 『뉴스페이퍼』(@hello.newspaper.bye)의 공동 편집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