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영 — 시간이 지나면 다 똑같아…

유진영 — 시간이 지나면 다 똑같아…

불세출의 명작 ‘내 이름은 김삼순’ 속 재회한 연인이었던 희진과 진헌은, 흘러간 시간만큼 멀어진 마음의 거리를 회복하지 못하고 다시 이별 앞에 선다. 희진은 진헌에게 찾아온 새로운 사랑을 보며 잔인하고도 애석한 시간의 공평함에 대해 말한다.

“지금은 반짝반짝 거리겠지.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 똑같아…”

그렇다. 시간은 공평하다. 물론 이 공평함이 모든 시간의 무게나 가치가 같다는 순진한 낙관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모든 시간의 종착지가 예외 없이 하나라는 의미에 가깝다.

그래서일까. 종종, 아니 사실 자주 왜 태어났는지, 왜 내가 선택한 적 없는 이 삶을 계속 살아야만 하는지에 대해 생각한다. 이는 때로는 견딜 수 없는 괴로움으로, 때로는 아직 오지 않은 일들에 대한 막연한 예감으로 다가온다.

내가 그릴 수 있는 단 하나의 선명한 미래가 있다면 언젠가 내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뿐이다. 그 형태가 무엇일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내가 죽는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어떤 이상한 짓을 하든 내 예상 밖을 넘어서는 결과는 없을 것이라는 이 단순한 진실은 매번 난이도를 갱신하듯 엄습하는 인생의 고난들을 헤쳐 나가게 하는 미미한 연료가 된다.

끝이나 유한함을 떠올리기 시작하면 금세 허무주의에 빠지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 구렁텅이로 완전히 들어가지는 않으려 한다. 오히려 언젠가 모두가 맞이하게 될 이 하나의 선명한 미래가 나와 타인을 잇는 마지막 조건이라는 사실을 되새겨 본다. 삶의 속도도 조건도 제각각이라 더 이상 거대한 이념이나 의제로 묶이기 어려운 시대에, 결국 모두 같은 미래를 앞두고 있다는 이 유일한 전제는 비슷한 좌표에 서 있는 타인의 존재를 인식하게 만든다.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릴 때면 나만큼 외로운 누군가를 발견하려는 마음으로 작업을 찾는다. 그것이 실제로 무엇을 바꿀 수 있는지와는 별개로, 미술을 통해 세상의 면면을 들여다보는 일은 내게 가장 유효한 방식이다. 여러 이유로 최근 내 곁에 길게 혹은 짧게 머물렀던 몇몇 작업을 떠올려본다.

먼저, 임영주가 지난 몇 년간 긴 호흡으로 이어오고 있는 죽음에 관한 리서치다. 나는 죽음 이전과 이후, 혹은 그 경계의 시간에 관한 이 집요한 탐구를 몇 년 동안 새끼 오리처럼 졸졸 따라다녔다. 작가는 죽음을 소멸이 아니라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으로 상정하며,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듯 부단히 죽음을 연습한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일은 역설적으로 삶에 대한 미련을 낳는다. 그러나 임영주의 미련은 자신의 생을 붙드는 집착이 아니라, 이미 떠나버린 이들이나 볼 수 없는 시간과 대상에 대한 것이다. 그들이 맞이했을 죽음 ‘이후의 시간’을 상상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 작업은 단선적인 시간의 배열을 뒤섞으려는 수행으로 나아간다. 죽음이라는 경계선에 선 채 주어진 시간을 자유자재로 접었다 펼치는 그의 보법은 죽는 일과 사는 일이 그리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허락한다. 전시장 한 가운데서 임영주의 인솔을 따라 ‘죽은 척’을 연습하던 순간, 불현듯 손에 쥐어졌던 돌의 온기가 아직도 생생하다. 삶과 죽음을 구분 짓는 딱 적당한 무게와 온도였다.

지난해 가을, 마포대교 일대에서 진행되었던 《윈드밀 에어》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9월 말이었지만 늦여름의 뭉근한 열기가 공기 중에 남아 있었다. 다양한 불안감을 촉발하는 다리의 위아래에서 장소에 낯선 숨을 불어넣는 작업들이 펼쳐졌다. 그중에서도 유독 마음에 남은 작업이 하나 있었는데, 엄지은의 〈애프터 폴〉이다. 어두운 밤, 질주하는 차들의 굉음 아래 교각에 빛으로 새긴 발자국과 수신자가 불분명한 안부 인사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낙하 이전의 시간과 남겨진 이들의 시간이 뒤섞인 채 두서없이 호출되는 광경을 바라보며 나는 이미 떠나보낸 몇 개의 이름을 떠올렸다. 그리고 무수한 익명의 얼굴들을 상상했다. 내가 서 있는 곳을 더없이 또렷하게 만드는 공공의 장소에서 치러진 이 무언의 의식은 불필요한 미사여구 없이 각자가 떠안은 슬픔과 불안을 그 자리에 잠시 놓아두게 했다.

만연한 무력감 속에서 방향 감각을 잃은 채 살아가다 보니, 남을 대신해 말하는 것의 어려움과 내 몫을 기꺼이 내어주는 일의 어려움을 자주 실감한다. 이 작업들이 건네는 위안은 억지로 ‘함께’를 말하지 않는 데 있다. 섣불리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하지 않는다는 점에도 있다. 다만 정해진 끝을 전제한 채 각자의 속도로 살아가다, 어느 순간 우연처럼 마주치는 작은 다정함을 남긴다. 그 미세한 신호를 붙잡은 채, 가느다란 연대감과 낡고 지친 몸을 이끌고 오늘도 살아 보기로 결심한다.

 

희진의 슬픈 예언에 대한 진헌의 대답은 이렇다. 


“사람들은… 죽을 걸 알면서도 살잖아…”

 

유진영 @dufqkesp111

유진영은 시각예술의 범주에서 기획과 글쓰기를 한다. 성실한 미술 노동자를 꿈꾸며, 삶을 이루는 구체적인 단위로서 미술을 다룬다. 두산아트센터 두산갤러리에서 일하고 있으며 비평 웹진 앱스(abs)를 공동 운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