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광하 — 기후위기 매뉴얼
올해는 봄부터 열심히 사과나무를 베고 그 자리에 밤나무, 감나무, 호두나무를 심었다.
1년생이었던 어린 사과나무 묘목은 이곳에서 14년이나 자랐다. 심고 3년이 되자 진짜 사과가 열렸다. 벌레가 먼저 먹고 일부 병든 사과도 있었지만,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키워낸 첫 결실은 너무도 달콤했다. 시골살이를 시작한 우리의 선택이 과연 잘한 것일까? 항상 불안했던 마음이 이 사과 한 알에 모두 사라졌다. 이제는 기후변화로 더 이상 사과가 자랄 수 없게 되었지만, 사과가 주렁주렁 열리는 상상을 하며 나무를 심던 날을 기억한다.
처음 만난 땅은 약간의 경사를 오르자 넓게 펼쳐진 밭이었으나, 오랫동안 방치되어 풀이 무성했다. 우리는 이곳이 숲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막 태어난 아이가 뛰어놀고, 일하다가 나무 그늘에서 쉬기도 하며 다양한 과일이 열리는 정원 같은 농장을 상상했다.
우리가 도시 생활에 회의를 느낀 건 너무 빠르게 변하는 세상, 그리고 오래된 것들이 금방 잊혀가는 아쉬움 때문이었다. 작은 것들이 오래오래 기억에 남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연은 어떠한가? 은행나무는 천 년 이상을 산다고 한다. 만약 우리가 땅을 구해 그곳에 나무를 심는다면 지구에도, 내 삶에도 의미 있지 않을까? 작은 씨앗들이 모여 울창한 숲이 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우리의 삶을 이곳에 기록하고 싶었다.
옛날에 흙벽돌을 만들던 공장이 있던 마을답게 꽃비원의 토질은 황토이다. 황토는 철분 산화물이 풍부하고 미생물 활성도가 높지만, 점질 토양으로 비가 오면 물이 고이고 배수가 잘 안되는 편이다. 열심히 잡초를 제거해 흙이 드러나게 되면, 비가 온 다음 날은 장화에 흙이 달라붙어 밭을 둘러보기 힘들 정도였다.
농장을 풀로 덮자! 밭에 군데군데 난 클로버를 다니는 길에 옮겨 심기 시작했다. 일부 잔디를 심기도 하고, 열심히 정원을 관리하듯이 뿌리는 남겨놓고 일정한 높이로 깎아주었다. 시간이 지나자 키가 큰 풀들은 씨앗을 맺지 못하고 잘려나가 점점 사라졌고, 그 자리에 키가 낮은 클로버, 민들레, 쑥이 저절로 번져 나갔다. 나무가 자라며 평면이었던 농장은 점점 입체적으로 바뀌었다. 농장을 시작하면서 매년 작성했던 다이어리를 모아 ‘꽃비원 농사 매뉴얼’로 다듬어 나갔다. 농사 경험도 쌓이고 이제는 제법 안정적인 생산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던 순간, 2020년 여름이 들이닥쳤다.
그 해 장마는 중부지방을 기준으로 6월 24일에 시작해 8월 16일까지 총 54일간 이어지며 역대 최장 기록을 경신했다. 기후위기를 실감한 순간이었다. 습도가 높아지자 곰팡이균으로 바질은 녹아내렸고, 벌들이 활동하지 못하게 되자 호박은 수정이 이루어지지 않아 결실을 맺지 못했다. 결국 장마 기간 동안 작물을 수확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내리는 비만 바라보았다. 우리가 시설에서 작물을 재배했다면 달라졌을까? 이 비를 피할 수 있었을까?
주변 농가를 둘러보니, 그동안 이렇게 비가 많이 내린 적이 없었던 탓에 저지대에 지은 비닐온실이 모두 물에 잠겨 있었다. 시설재배 덕분에 5월에 수확하는 딸기를 겨울에도 맛볼 수 있게 되었지만 봄철 급격한 기온 상승으로 수확 시기는 점점 짧아지고 있다. 시설재배도 외부 환경 요인에 맞춰 변화해 나가야 한다. 결국 노지재배, 시설재배 모두 기후변화에 적응해 나가야 하는데, 노지재배는 더 생태적으로, 시설재배는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모습이다.
우리는 환경을 제어하기보다 다년생 작물을 늘려가며 적응하기로 했다. 기후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과일나무, 나물, 허브류 같은 다년생 작물을 농장 곳곳에 심어 놓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관찰한다.



지구에서 인간이 사라진다면 도시는 다시 숲과 초원으로 덮여 생태계가 복원된다고 한다. 기후위기로 인한 미래의 불확실성은 두려움으로 다가올 수 있겠지만 우리가 심은 나무와 식물들은 대부분 이 자리를 지켜 나갈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런 작은 활동이 지구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두려움보다는 약간의 희망을 가져봐도 좋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는 매년 봄이면 나무를 심는다.
정광하 @flowerraining.farm
꽃비원에서 농사를 지으며 농촌과 도시의 관계를 잇는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로컬식당 꽃비원홈앤키친을 함께 운영하고 있으며, 시골생활 10년의 이야기를 담아 <시골살이, 오늘도 균형>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