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희 — 나의 실용음악

박민희 — 나의 실용음악

모든 음악엔 고유한 음악 문법이 있다. 특정 음악을 잘 감상하기 위해서는 그 기준에 맞춰 감상의 귀를 조율해야 한다.

또한 음악은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다. 경험의 필터, 기분, 촉각 등 총체적 활동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한국 전통음악을 들을 때 우리는 어떤 감상 조건을 갖고 있나. 과연 전통음악이 통과할 수 있는 귀를 갖고 있을까? 전통음악 같은 거 듣지 않더라도 세상엔 재밌는 게 많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 아닐까? 이 음악을 이해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테드 창의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 속 등장인물이 헵타포드 언어를 배우며 시간을 비선형적으로 지각하는 것처럼, 어쩌면 상상 못 할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한국 전통음악의 속성이 너무 재밌다. 독자적인 인토네이션과 호흡으로 연결되는 흐름이 재밌다. 모든 박을 정확하게 같은 길이로 연주하는 BPM과 달리, '1분 안에 정해진 숫자의 정간을 연주하시오'로 정의되는 빠르기 체계도 재밌다. 연주자들이 각자 그 1분의 구성을 달리 생각하더라도 함께 연주하는 상대의 호흡을 느끼며 즉각적으로 맞추어 나가는, 일종의 즉흥성과 그 '눈치'가 전통음악을 성립케 하는 요소라는 게 재밌다. 한국 사회의 '강요된 눈치'는 그토록 싫으면서도, 음악에서의 눈치는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다.




흔히 '전통음악'과 '국악'을 혼용하곤 하는데, 나는 둘을 다른 맥락으로 사용한다. 아래의 구분은 통용되는 개념이 아닌 나 개인의 의견이다.


전통음악: 비물질적 개념. 지역 공동체가 강한 정체성을 토대로 독자적 문화 생태를 유지하던 시기의 음악. 외래 요소조차 지역 고유의 논리로 해석하고 토착화·향토화하던 시절의 음악. 

국악: 전통을 포괄하는 개념. 산업과 매체를 매개 삼아 전통음악의 흔적을 유통·재편한 음악과 전통음악 모두를 일컬음.



어느새 음악의 생태계, 즉 야생의 법칙에서 멀어진 전통음악은 보존을 위한 전용 극장으로 격리되었다. 나는 전통음악이 좋은데, 전용 극장에는 어쩐지 선뜻 발길이 가지 않는다. 왜 국악 전용 극장은 현재와 단절된 역사적 시각 기호들로 가득할까? 기와, 목조 난간, 창호, 한복, 갓, 연주자들의 정형화된 무대 매너…. 그런 것들은 음악을 현재에 흐르게 할까, 아니면 과거에 박제해 둘 뿐일까? 

전통의 시제는 무엇일까? 나는 전통의 시제가 '현재완료진행형'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에 시작되어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는 행위라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1998년에 국악 전문 학교에 입학하며 전공 학습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많은 질문이 생겼고, 그 질문들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한국 전통음악은 왜 '음악'이라는 보통명사로는 설명되지 않을까? 왜 늘 '전통'이라는 수식이 붙어야만 할까? 판소리, 민요, 가곡 등을 전공한 사람들이 '성악'을 한다고 밝힐 때, 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국 전통음악에도 '성악'이 있냐고 되물을까? 목소리로 하는 음악을 일컫는 '성악'이라는 단어는 왜 서양 고전음악이 전유할까? 1800년대부터 '가곡'이라는 명칭을 가진 우리나라의 성악곡은 왜 '전통 가곡'으로 불려야만 할까? 오히려 리트(Lied)를 '독일 고전 가곡'이라 부르는 것이 한국의 입장이어야 하는 건 아닐까? 이 모든 정황은 한국 전통음악을 바라보는 우리의 인식을 어디로 이끌고 있는가.



AI 생성형 국악인의 모습 (출처: GEMINI 2026년)


실존 국악인의 모습 (출처: @beattitude.magazine 2021년)




음악이 생동하는 장소,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이는 장소에서 전통음악을 듣고 싶다. 아주 드물게 존재하는, 그 음악이 자신의 ‘실용음악’인 음악가들의 생각을 듣고 싶다. ‘전통’이 머금고 있는 시간성 가운데, ‘지금 이 순간’만을 느끼고 싶다. 시각적인 기호를 배제하고, 음악의 비물질성을 느끼고 싶다. 기왕이면 친구들과 함께. 혼자서는 너무 쓸쓸해. 아니, 혼자만 느끼기엔 너무 재밌으니까.

 

박민희 @_parkminhee

한국 전통음악을 좋아하고, 지금 이 순간 태동하는 창작물들에 호기심이 많은 사람. 쇠락하는 음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세상을 배웠다. ‘황태중임남’이 ‘도레미파솔라시’로 번역될 수 없음을 깨닫는 순간 창작자가 되었다. 각기 다른 철학을 가진 세계들을 엮어 장르 밖의 공연과 음악을 만들고 있다.

@relearning.ear @gudong.label @ozak_korea @haepaary parkminhe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