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다 itta — 길 위의 가족 밴드: 시코쿠 순례와 필드 레코딩
마르키도 상은 불교 사상에 열광하는 불교도였다. 대학 때까지는 열심히 성당에 다녔던 나였지만,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가 불교 성지를 찾아 인도에 배낭여행을 길게 다녀온 당시의 충격에 대해 끝도 없이 말해서, 같이 가자고 계획을 세우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때 내 몸속에 새 생명이 깃들게 된 것을 알게 되었고, 인도 여행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날은 그의 일본 본가 거실에서 NHK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일본에 1200년이나 이어지고 있는 불교 순례길이 있습니다!”
모니터 속으로 들어갈 것처럼 화면을 향해 몸이 기울어 있던 나는, 프로그램이 끝나자마자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우리 이거 가자!”
시코쿠 순례는 일본을 구성하는 네 개의 큰 섬들 중 하나인 시코쿠 전체에 분포되어 있는 불교 사찰 88개(혹은 108개)를 순례하는 여정이다. 건장한 성인이 걸어서 한 달 반 정도를 소요해야 하는 이 순례길은, 시작점과 끝이 이어지는 순환 구조다.
시코쿠의 사찰들은 자연환경을 섬기는 일본의 신사와 함께 있는 곳이 대부분이었고, 사찰로 가는 도중에 공기가 신비롭게 변화하는 지점을 마주하는 경험을 자주 하게 되었다. 사찰에서는 손과 입을 씻고, 종을 울린 뒤, 진언眞言(만트라)을 암송하는 의식을 행하게 된다. 처음에는 낯선 의식이었지만, 반복해서 입 밖으로 내는 소리는 어느 순간 종교 의식을 넘어 몸의 호흡으로 트랜스되었다. 우리는 사찰 경내에 레코더를 두고 타종 소리와 그곳의 앰비언스를 수집했다.

2014년 첫번째 시코쿠 순례길에서

범종을 타종하며 녹음하고 있는 마르키도와 리아이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여행하는 가족 음악 그룹 TENGGER(텐거)다. 우리의 이름은 '경계 없이 펼쳐진 무한한 하늘'을 뜻하는 몽골어에서 가져왔다. 헝가리어로는 '드넓은 바다'를 뜻하기도 한다.

⟪Electric Earth Creation⟫ album cover
순례길에서 만나는 시코쿠의 주민들은 백의白衣를 입은 순례자들을 발견하면 대가 없이 베푸는 오셋타이(환대)라는 행위를 통해 먹을 것, 잠자리, 노잣돈을 건네기도 한다. 우리도 몇 차례 도움을 받았다. 누군지도 모르는 이방인에게 베풀어주는 조건 없는 다정함에 감동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오셋타이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던 중, 순례길에서 '미니 시코쿠'를 발견하게 되었다.
시간과 경제적인 여유가 필요한 시코쿠 순례를 간접 경험할 수 있도록, 한 사찰의 경내에 모든 사찰의 흙을 담은 주머니를 만지며 걷게 만든 장치라든가, 얕은 산 전체에 모든 사찰의 본존을 본떠 만든 석상을 설치한다든가 하는 식이다. 우리는 소리로 미니 시코쿠를 만들기로 했고, 기록한 모든 사운드들의 레이어를 겹쳐보았다. 그랬더니 많은 소리를 겹쳤는데도 미니멀하고 명상적인 사운드가 탄생했다. 그렇게 정리된 음원을 일본의 전통 종이로 하나하나 패키징한 카세트테잎 음반 <MINISHIKO>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사운드와 함께 <음악과 순례>와 <Pilgrim Progress>라는 타이틀의 전시와 <관음観音>이라는 인터랙티브 퍼포먼스 시리즈를 한국에서 진행했다.


⟪Pilgrim Progress⟫ 전시 중에서, 88개 사찰 경내 콜라주 사진 & 영상 작업
첫 번째 순례 이후 시코쿠병을 앓기 시작할 정도로 그곳의 영적인 자연을 더 많이 관찰하고 싶어졌다. 결국 순례길의 정중앙에 위치한 고원지대의 마을 쿠마코겐에서 오래된 집을 하나 구했고, 서툴지만 DIY 리노베이션을 시작했다. 라이브 투어와 병행하다 보니 진행이 많이 더뎠다. 그러다 팬데믹이 터지고, 잡혀있던 투어가 전부 캔슬되고, 마르키도 상이 잠시 어머니를 만나러 간 사이에 국경이 닫혀버렸다. 그렇게 본의 아니게 가족과 생이별한 채 지내는 동안에, 그는 혼자서 묵묵히 리노베이션을 거의 마무리했다.
여러 번 PCR 검사로 코를 찌르고, 그 당시 열려 있던 먼 공항에서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며 우리는 재회했다. 그리고 함께 리노베이션을 완성하며 그 공간을 Studio Kyurt(Kumakogen + Yurt)라 이름 붙였다. 이후 우리는 시간이 허락하는 때에 계속해서 순례를 이어가고 있다.

Studio Kyurt 리노베이션 과정과 Kumakogen 주변 경관
TENGGER의 새 앨범 《SKY》가 3년 만에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수록곡 중 <Indigo>라는 트랙에는 지난해 순례길에서 만난 경이로운 순간의 소리가 숨어 있다. 코치 현의 끝없는 수평선 앞, 눈을 뜨면 하늘과 바다만 보이는 곳. 사방이 칠흑의 어둠이었다가 아침 해가 떠오르며 주홍빛 그라데이션이 번지기 바로 직전의 순간, 온 우주가 인디고Indigo 하늘빛으로 물드는 시점에 녹음한 필드 레코딩 사운드다. 그리고 앨범의 뒷표지에 그곳의 광경이 담겨 있다.
‘아 비 라 훔 캄 (A VI RA HŪṀ KHAṀ)’. 앨범의 마지막 트랙 <O>에서 내 몸을 통해 전하는 가사는 이 다섯 가지의 소리들이다. 이들은 우주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거대한 원소들을 하나씩 상징하고 있다.
아 (A): 땅(地)
비 (VI): 물(水)
라 (RA): 불(火)
훔 (HŪṀ): 바람(風)
캄 (KHAṀ): 하늘(空)
앨범의 메인 커버 디자인은 순례 중에 보았던 인상적인 하늘의 모습과 음양이 순환하는 이미지를 담고 있다.
다시 TENGGER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던 2013년으로 돌아가 본다. 시코쿠 순례를 알게 되기 전, 우리가 처음으로 만들었던 음반 《Electric Earth Creation》에는 공교롭게도 <Mantra> 라는 트랙이 있다.
우리는 이미 순환하고 있었다. 시코쿠 순례처럼.

⟪SKY⟫ album cover
있다 itta of TENGGER @ittaexist
있다(itta)는 가족 음악 그룹 TENGGER @tenggerland 의 멤버이자 시각예술가이다. 환경과 정신의 경계를 탐색하며 음악, 전시, 퍼포먼스를 통해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TENGGER는 최근 새 앨범 《SKY》를 발표했다.